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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人才)를 뽑는 일을 널리 하지 않을 수가 없다제75화(話) 리우지자(犁牛之子)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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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1.26  08: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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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종 73권, 18년(1436 丙辰 / 明 정통(正統) 1년) 윤6월 15일(己卯)

고신의 정조외를 삭제하여 달라는 조유례 등의 상서.

판관(判官) 조유례(趙由禮)·부교리(副校理) 조유신(趙由信)이 상서(上書)하기를,

“옛날에 사람을 씀에 있어 세루(世累)에 구애하지 않았던 것은 오래입니다. 숭백(崇伯: 우(禹)의 아버지인 곤(鯀)의 관직명.) 을 주살(誅殺)하고도 우(禹)를 사공(司空)에 임명하였으며, 채숙(蔡叔: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이 방폐(放廢)되었으나, 채중(蔡仲)으로 제후(諸侯)를 삼았던 것입니다. 이로 본다면, 그 아버지가 악하다 하여 그 아들의 선(善)을 폐하지 않았음이 명백하오며, 역대의 사기(史記)를 더듬어 보건대, 그 어머니가 민간인에게 시집갔어도, 아들이 현달한 정승이 되었는가 하면, 그 어머니가 의롭지 않은 일을 행하였어도 아들이 재상(宰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말씀하시기를, ‘얼룩소[犂牛]의 새끼라도 그 빛깔이 붉고 뿔이 바로 나면 〈쓰지 않으려 해도〉 산천(山川)이 놓겠는가.’ 하셨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옵서 천지가 모든 황예(荒穢)를 포용함과 같으신 도량(度量)과 천택(川澤)이 온갖 오물(汚物)을 받아들임과 같으신 덕을 갖으시와, 신 등으로 하여금 성조(聖朝)에 벼슬하여 그 직분을 펴게 하시니, 성은(聖恩)이 편중(偏重)하여 보효(報效)를 꾀할 길이 없나이다. <이하 생략>”

孔子曰: “犂牛之子, 騂且角, 山川其捨諸?”

2)성종 13년(1482 임인 / 명 성화(成化) 18년) 10월 18일(계미)

뇌물을 받은 관리인 김맹규의 아들 김우겸이 과거에 응시하기를 청하다.

장리(贓吏: 뇌물을 받아 먹은 관리. 장물(贓物)이 40관(貫) 이상이면 참형(斬刑)에 처하였음.) 김맹규(金孟規)의 아들 김우겸(金友謙)이 전문(箋文)을 올려 과거(科擧)에 응시하기를 청하니, 승정원(承政院)에 전교(傳敎)하기를,

“김우겸으로 하여금 신설(新雪)이란 제목의 사운 율시(四韻律詩)를 지어서 올리게 하라.”

하였다. 김우겸이 곧 율시(律詩)를 지어서 올리니, 전교(傳敎)하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얼룩소의 새끼가 털빛이 붉고 뿔이 난다면 산천(山川)은 그것을 버리겠는가?’ 하였으니, 인재(人才)를 뽑는 일을 널리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별히 과거 시험에 응시하도록 허가하라.”하였다.

贓吏金孟規之子友謙上箋請赴擧. 傳于承政院曰: “令友謙, 製新雪四韻律詩以進.” 友謙卽製進, 傳曰: “古云: ‘犂牛之子、騂且角, 山川其舍諸?’ 取人不可不廣, 特許赴試.

3)연산군 3년(1497 丁巳 / 明 홍치(弘治) 10년) 3월 20일(壬戌)

대간이 합사하여 공신 가자의 일로 간언하다.

다시 서계(書啓)하기를,

“하교에 ‘지금 공신이 어찌 다 소인이겠는가?’ 하시었는데, 신 등이 아뢴 것은, 공신 중에 소인이 많고 또 용잔(庸孱)·천품(賤品)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의 올린 두 소(疏)에 이미 그 실지를 다 말씀드렸사오니, 전하께서 만일 깊이 생각하신다면, 반드시 경성(警省)하시는 바 있어 성명을 거두실 것이옵니다. 하물며 전하의 오늘은 마땅히 정시(正始)를 먼저 해야 할 때입니다. 정시의 도(道)는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로 하는 것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인군의 형세는 다 조정에 있으므로 조정이 높아지면 인군의 형세도 역시 높아지고, 조정이 높아지지 못하면 인군의 형세 역시 높아지지 못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여러 간사한 무리들을 다 포양하여 만균(萬鈞: 30만근)이나 되는 큰 형세를 낮추려 하심은 어쩐 일입니까? 성종께서 임사홍과 혼인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가 상 없는 소인으로 조정 정사를 탁란(濁亂)하므로 물리쳐 버리고 끝내 한 품계(品階)도 더하지 않았으니, 성종의 종묘 사직을 위한 깊은 뜻이 있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얼룩소 새끼가 붉은 색이요 또 뿔이 났으면 그 제수를 산천이 흠향하지 않으랴.’ 하였으니, 사홍의 아들이 혼인할 만 하다면 성종께서 이것을 버리시겠습니까.”

하였으나 좇지 않았다.

孔子曰: “犂牛之子騂且角, 山川其舍諸.

4)4)중종 13년(1518 戊寅 / 明 정덕(正德) 13년) 11월 3일(己亥)

석강에 나아가니, 인재 등용에 귀천을 가리지 말 것을 아뢰다.

석강에 나아갔다. 참찬관 김정국이 아뢰기를,

“강(講)하는 글에 ‘얼룩소의 새끼가 붉고 또 뿔이 나면 제사에 쓰지 않으려 해도 산천(山川)의 신이 버려두겠느냐?’하였는데, 여기서 성인(聖人)의 공평정대(公平正大)하고 사정에 치우친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옛날 어진 이는 사람을 천거할 적에, 원수를 천거하거나 자식을 천거하거나 혐의쩍게 여기지 않고 오직 어진 것만 볼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서얼(庶孽)의 유는 용렬한 무리로 대우하며,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쓰지 아니하니, 이것이 우리나라의 폐정(弊政)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관방(關防)이 있으니 훼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죄가 있는 사람은 연좌하여 금고(禁錮)해야 하지만 혹 장리(贓吏)의 자손은 비록 준걸(俊傑)하고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으레 수용(收用)하지 않으니, 임금의 도량으로 말한다면 본디 이를 따지지 않고 발탁해 써야 합니다. 다만 조종의 법은 변경해서는 옳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특별히 쓰더라도 무방합니다.” 하고, 시강관(侍講官) 민수원(閔壽元)이 아뢰기를,

“가령 공보(公輔)의 재주가 서얼의 무리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법을 폐할 수 없고 나라에서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다만 쓸 만한 것을 보면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들어 쓰는 것은 왕자(王者)의 도량입니다. 그 자신에 있어서도 잘못된 점이 있었더라도 후에 고쳤으면 또한 수용해야 합니다. 옛말에 ‘남의 지나간 악함을 생각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도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 其舍諸. ‘不念舊惡.’人君用人亦當如是.

5)중종 24년(1529 己丑 / 明 가정(嘉靖) 8년) 9월 13일(乙巳)

폐비 신씨와 복성군에 대한 김식의 상소문.

충청도 부여(扶餘)에 사는 김식(金軾)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신씨(愼氏)를 폐한 죄목은 무엇입니까? 공자(孔子)는 얼룩소의 새끼라도 빛깔이 붉고 뿔이 똑바로 났으면 버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신씨(愼氏)의 덕은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씀입니까? 옛날 추연(鄒衍)이 슬픔을 품자 여름철에 서리가 내렸으니,(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추연은 중국 전국 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임치(臨淄)사람. 연 소왕(燕昭王)의 존경을 받아 스승이 되었으나 다음 혜왕(惠王)이 즉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참소를 믿고 추연을 옥에 가두었다. 추연이 갇히자 여름철인데도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워 곡식이 자라지를 못하였다.) 금년의 가뭄은 무어 괴이할 게 있습니까? 박씨(朴氏)를 축출하자 길가는 사람들도 모두들 무죄라고 했습니다. 신은 사사로 그에 대하여 평하건대 ‘복성군(福城君)은 나이가 세자보다 위이고 총애 받는 어머니의 후원이 있으므로 잘못 생각한 자들은 여희(驪姬)가 신생(申生)을 무고한 것(신생은 중국 춘추 시대 진 헌공(晉獻公)의 태자. 헌공의 총희(寵姬)인 여희가 자기의 아들 해제(奚齊)를 후사로 삼고자, 신생을 헌공에게 참소하여 곡옥(曲沃) 지방으로 내쫓았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여희가 계속 참소하자 진 헌공은 태자 신생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신생은 도망하라는 여러 사람의 권유를 뿌리치고, 끝내 자결하였다.)과 같은 변이 일어나 국본(國本: 세자)을 동요시킬 위험이 있지 않겠냐고 우려할 것이라.’ 여겨집니다.”

했는데, 말이 너무 황당하고 이치에 닿지 않았다. 상(上)이 이 소(疏)를 내리면서 전교하였다.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들이 많아 지극히 경악스럽다. 평상시라면 죄줄 것이로되 구언(求言)한 뒤라 말 때문에 죄받으면 언로(言路)에 방해가 될까 두렵다.”

犂牛之子, 孔子取之

6)인조 24(1646년 淸순치(順治) 3년)년 10월 24일 丙申

심액·조경·정지화·정언 원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액(沈詻)을 대사헌으로, 조경을 대사간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부응교로, 정언원(丁彦瑗)을 지평으로, 엄정구(嚴鼎耉)를 헌납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이무를 정언으로 삼았다. 이무는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이고 이경전(李慶全)의 아들인데 사람들이 성각(騂角)으로 일컬었으니, 그의 지론(持論)이 아주 올바르기 때문이었다.

騂角

이 말은 논어 옹야(雍也)편 4장의 말로

子謂仲弓曰 犁(리)牛之子 騂(성)且角이면 雖欲勿用이나 山川이 其舍諸아?

(공자께서 중궁(仲弓)을 평하여 말하길 “얼룩소[犁牛] 새끼가 색깔이 붉고[騂] 떠 뿔이 제대로 났다면 비록 산천(山川)의 제사에는 쓰이지 않고자 하나 산천의 신(神)이 어찌 그를 버려두겠느냐?”했다.)

이 문장에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하기를

리(梨)는 여러 가지 무늬가 섞인 것이요, 성(騂)은 붉은 색이니, 주(周)나라 사람은 적색(赤色)을 숭상하여 희생(犧牲)을 붉은 것을 썼다. 각(角)은 뿔이 완전하고 단정하여 희생물의 규격에 알맞은 것이다. 용(用)은 써서 제사함이다. 산천(山川)은 산천의 신(神)이니, 사람이 비록 제사에 쓰지 않으려하나 신(神)이 그냥 버려두지 않을 것이란 말씀이다.

중궁(仲弓: 염옹)은 그의 아버지가 미천하고 행실이 악(惡)했으므로 공자께서 이렇게 비유했으니, 아버지의 악행(惡行)이 그 선(善)함을 버릴 수 없으니, 중궁(仲弓)과 같은 어진 인물은 스스로 마땅히 세상에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라고 했다.

천지(天地)에 제사하는 소는 뿔이 밤알만 한 송아지를 쓰고, 종묘(宗廟)에 제사하는 소는 뿔이 한 줌 정도의 소를 쓰고, 빈객(賓客)을 대접하는 소는 뿔이 한 자 정도 큰 소를 쓴다. 그 색이 붉고 또 뿔이 규격에 맞는 것이면 쓰임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궁(仲弓)은 아버지가 미천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으므로 공자께서 이렇게 비유하여 아비의 악(惡)이 그 자식의 선(善)함을 버릴 수 없어서 하신 말씀이다.

붉은 색을 숭상한 것은 예기(禮記)의 명당위(明堂位)에 하후씨(夏后氏)는 흑색을 숭상하였고, 은(殷)나라는 백모(白牡: 백색의 수컷)를 썼고, 주(周)나라는 붉고 건강한 것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길 고수(瞽瞍)를 아버지로 둔 순(舜)임금이 있었고, 곤(鯀)을 아버지로 둔 우(禹)임금도 있었으니, 옛 성현들은 가문과 족류(族類)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자식이 아버지의 허물을 고쳐서 악(惡)을 변화시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효(孝)라고 이를 만 할 것이다.

한마디로 성각(騂角)이라면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숨은 인재(人才)를 지칭하는 비유어로 쓰였다.

첫 번째 기사의 상소는 ‘부녀자의 실행(失行)이 현저하여 그 죄를 다스린 자의 자손은 동반직(東班職)에 서용하지 않는다.’는 기록을 보고 자신들의 조모(祖母: 金氏)가 문벌(門閥)의 후예(後裔)로서 아름다운 복식(服飾)과 사치스런 거실(居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샀으며, 겸하여 조모의 아버지인 김주(金湊)가 개국 초기에 오랫동안 헌사(憲司)의 법을 쥐었던 것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지금까지도 트집을 잡고 있고, 또 난신(亂臣) 박포(朴苞)가 평소에 조부와 더불어 노비(奴婢) 관계로 틈이 져서 허언(虛言)들을 조작하여 전파한 바 조금도 규문(閨門)을 엄숙히 다스리지 않은 과실 같은 것도 없거니와, 공초(供招)를 받아 치죄(治罪)한 사실도 없는데, 한갓 전해 오는 의혹을 가지고 드디어 험절로 삼아, 자신들이 불이익을 받고 있으니 이를 바로 잡아 달라는 상소인데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후세의 사관(史官)들이 평을 해 놓기를

“이 사람들은 그 조모(祖母)의 실사(實事)를 도리어 허사(虛事)라고 하여, 굳이 임금에게 아뢴 것도 불가하려니와, 또 숭백·채숙의 악함을 그 조모에게 비겼고, 우임금과 채중의 어짊을 자신들에게 비하여, 그 글 가운데의 말이 은연중에 자찬(自贊)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어, 한갓 자기의 훌륭한 점을 찬양할 줄만 알고 어버이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이 죄가 되는 줄은 모르니, 비록 이를 가리려 해도 마침내 가리지 못하고 말았으며, 이른 바 ‘아버지의 악한 것을 가지고 아들의 착한 것을 폐할 수는 없다.’고 한 것도, 다른 사람이 천거하여 말하는 것이라면 가하거니와, 자기의 일을 논하면서 이와 같이 일컬었다면 과연 되겠는가.”라고 비꼬고 있다.

두 번째 기사는 뇌물을 받았던 장리(贓吏) 김맹규(金孟規)의 아들인 김우겸(金友謙)이 전문(箋文)을 올려 과거(科擧)에 응시하기를 청하니, 그에게 신설(新雪)이란 제목의 사운율시(四韻律詩)를 지어서 올리게 하고, 이를 받아 본 성종이 전교(傳敎)하기를 이 말을 인용하면서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한다.

세 번째 기사는 대간(臺諫)에서 합사하여 공신 가자(加資)를 막아 달라며 성종 때 임사홍은 인척이었지만 등용은 막은 예를 들어서 공신의 적장자(嫡長子)의 가자(加資)를 막아 달라는 것이었다.

이는 3월 14일 임사홍 외 90여명의 공신 적장자들을 가자(加資)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실은 그 표적은 임사홍으로 그는 성종과 혼인을 한 연산군의 입장에서 보면 인척간으로, 인품이 어질지 못하고 탐욕과 음험한 자라며 그를 탄핵하기를 ‘임사홍(任士洪)은 교만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음험 잔혹하여 물건을 해치는 것은 소인 중에도 심한 자입니다. 그가 처음 벼슬길에 나올 때에 큰 거짓이 정직한 것처럼 보이니, 성종의 성명하심으로도 우선 쓸 만한가를 시험하여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위가 점점 높아질수록 그 간악함이 더욱 노련하여 권세를 잡고 농락하며 조정사를 탁란(濁亂)하므로 성종께서, 그 나라 그르칠 조짐을 아시고 물리쳐 멀리하였으되, 서반(西班)에 두어 녹을 잃지 않게 한 것은 그가 공신의 후손이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연산군이 이 대간의 주청을 받아들였으면 바른 임금이 되었을 것이지만 왕권 강화 차원에서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잘 알고 있던 임사홍 같은 소인배들을 동원하여 기득권층을 약화시키려는 의도 하에서 공신들의 적장자 90명에게 한꺼번에 가자(加資)를 하여 공신들의 백 그라운드를 만들어 무소 불위의 왕권을 휘둘러보겠다는 포석이었으니 연산군의 그런 속내를 그 당시 대간들이 짐작이나 했었겠는가?

다만 원론적으로 핵심 인물인 임사홍만 물고 늘어진 것이니 대간들에게 임사홍이 정말 그런 위인이라면 성종은 왜 그와 혼인관계를 맺었겠느냐? 는 반론의 여지만을 남겨주어 답변만 궁색해지게 되고 말았다.

네 번째 기사는 중종 13년 11월 석강에 나아가 참찬관 김정국이 논어의 이 말을 들어서 성인(聖人)의 공평정대(公平正大)하고 사정에 치우친 마음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임금이 사람을 쓰는 데에도 이와 같이 해야한다면서 인재 등용에 귀천을 가리지 말 것을 아뢰는 기사이다.

다섯 번째 기사는 중종 24년 9월 충청도 부여(扶餘)에 사는 김식(金軾)이 폐비 신씨(愼氏)와 복성군에 대한 상소문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여 폐비 신씨(愼氏)의 덕(德)이 얼룩소만도 못하단 말이냐고 항변하면서 경빈 박씨(박씨) 소생의 복성군((福城君)을 옹호하는 상소인데 중종(中宗)은 대로했지만 구언(求言)으로 올린 것이라 벌주지도 못하고 화를 삭이는 장면이다.

치마바위 전설의 모델이 된 폐비 신씨(愼氏)는 중종(中宗)의 첫째 왕후로 연산군 때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愼守勤)의 딸이다. 1506년 성희안(成希顔) 박원종 등이 종종 반정을 일으킬 때 연산군의 처남이요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은 신하로서 임금을 폐할 수 없다고 반대하여 성희안 등에게 살해되었다. 반정이 성공하고 중종이 즉위하자 신씨(愼氏)도 왕후로 책봉되었으나, 자기들이 반역으로 몰아 죽인 사람의 딸이 왕후로 있는 것에 불안을 느낀 성희안과 유순정(柳順汀) 등의 책동에 의해 왕후가 된 지 7일 만에 본가로 쫓겨나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영조(英祖) 15년(1739)에야 단경왕후(端敬王后)로 복위됐다.

여섯 번째 기사에서 이경전(李慶全)의 아들인 이무(李袤)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된 것을 사관(史官)이 그를 성각(騂角)이라고 추켜세우는 장면인데 아마도 그 사관(史官)과 친구인 듯 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이무(李袤)는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의 손자이자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의 아들로 1600(宣祖33)년에 태어나서 1684(肅宗10)년에 죽은 문신으로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4대째 호당(湖堂)을 배출한 명문 집안 출신으로 임란 때 죽은 김첨(金瞻)의 딸이다. 그는 1629년(仁祖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1641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이어 지평(持平)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듬해 정언으로 복귀했다가 다시 지평(持平)직을 수행했다. 1646년에는 사헌부지평으로 재직하던 중, 병을 칭하며 사직소를 올려 태자(太子) 보익(輔翼)에 대한 문제와 언로(言路)의 개방 등에 대한 시폐(時弊)를 간곡히 진달하여 인조(仁祖)의 신임을 얻었고,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재 발탁되었다. 이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으며 지론(持論)이 항상 올바르고 귀감이 되어 당시 명류(名流)로서 자못 명성이 있었다. 그 뒤 호서(湖西) 지방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붕당(朋黨)의 화(禍)와 어진 수령의 선택 등에 대한 상소와 아울러 재차 사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 뒤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 조경과 함께 언로의 막힘을 걱정하며 체차(遞差 : 관직을 교체함)를 청하기도 했다. 이어 대간이 김자점(金自點)을 탄핵하려는데, 정언(正言)으로서 인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미현감(海美縣監)으로 좌천됐다가 복귀해 1652년(孝宗3) 지평을 거쳐, 다시 외직인 서천군수(舒川郡守)로 보임됐다. 1656년 이후에는 필선·헌납·집의·사간·보덕 등 세자시강원과 사헌부 및 사간원에서 줄곧 근무한 간관(諫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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