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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이야기 > 백천 조선왕조 베스트셀러 <논어>
불우한 시절 소현세자에게 준 공부법은?제87화(話) 박문약례(博文約禮)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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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2.25  08: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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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종 2년(1547 丁未 / 明 가정(嘉靖) 26년) 1월 25일(戊寅)

부제학 주세붕 등이 올린 학문을 권하는 상소의 내용.

부제학 주세붕(周世鵬) 등이 상소하기를, <전략>

대개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마음[心]과 이치[理]일 뿐입니다. 마음이 비록 한 몸을 주장하지만 그 체(體)의 허영(虛靈)함은 족히 천하의 이치를 주관하며, 이치가 비록 만물에 산재하여 있지만 그 쓰임의 미묘함은 실로 사람의 마음을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마음과 이치는 서로 관통하여 간격이 없으므로 물(物)이 이미 바로잡혀지면 지(知)는 저절로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첫 가르침이며, 논어(論語)의 박아이문(博我以文)과 맹자(孟子)의 박학상설(博學詳說) 및 중용(中庸)의 학문사변(學問思辨)과 더불어 모두 도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것입니다.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데 그 문을 알지 못한다면 마침내 어떻게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견문 넓은 사람들이 공연히 밖을 좇아 많이 아는 것을 자랑하는 데만 힘쓰고 참된 이치가 일관되어 있는 곳을 찾지 않기 때문에 앎이 많으면 많을수록 마음은 더욱 막히고, 배움을 더욱 부지런하게 할수록 정신은 더욱 떨어집니다. 어찌 도를 보는 데 무익(無益)할 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힘쓰는 방법을 찾는다면, 주자가 이른바 ‘일의 드러난 것을 살피고 생각의 은미한 곳을 살피며 문자(文字) 가운데서 찾아보고 강론할 때에 찾아본다.’고 한 말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배우는 자가 이 방법대로 힘쓴다면 거의 어긋나지 않을 것입니다.

論語所謂博我以文.

2)명종 21년(1566 丙寅 / 明 가정(嘉靖) 45년) 6월 15일(甲戌)

독서당에 선온하고 율시를 짓게 하다.

독서당(讀書堂)에 선온(宣醞)하고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는 데 대한 탄식[招賢不至嘆]’이라는 어제(御題)를 내고 율시(律詩)로 짓게 하면서 어필(御筆)로 이황(李滉)을 가리킨 것이라고 주를 달았다.【이황은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학식이 뛰어났다. 소시부터 선현(先賢)의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마음으로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여 뜻을 맑게 가지고 행실을 독실하게 하였다. 권세를 쥔 간신들이 정권을 도맡아 국사가 날로 비하해질 때를 당하여 그는 결국 병을 핑계 삼아서 경상도 예안(禮安) 지방으로 물러가 살았다. 여러 번 조정의 소명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혹 나갔다 해도 곧 돌아오곤 하였다. 식량이 자주 떨어졌으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날마다 경서를 궁구하고 도를 즐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중년 이후에는 소견이 더욱 밝고 얻은 바가 매우 높았다. 학문이 심오하고 실천이 투철하였으니 비록 박문(博文)·약례(約禮)를 둘 다 극진히 했다 이르더라도 옳을 것이다. 지금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자취를 감추자 상이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니 국정이 날로 새로워졌다. 이무렵 이황의 문장 도덕이 한때 으뜸간다고 추천한 자가 있자 봄 초엽부터 전지를 내려 불렀는데, 이황은 신병이 쌓였을 뿐만 아니라 출처 문제를 놓고 매우 염려한 나머지 본도에서 여러 번 사퇴하였다. 그러자 위에서는 어의(御醫)를 급파하여 진찰케 하는 등 은권(恩眷)이 집중하였는데도 끝내 소명에 응하지 않았다. 그런 때문에 이처럼 시를 짓게 하였으니, 대개 은근히 측석(側席)의 뜻을 보인 것이다.】

博文約禮

3)명종 2년(1547 丁未 / 明 가정(嘉靖) 26년) 2월 7일(己丑)

홍문관 부제학 주세붕이 대학과 중용에 대해 설명하며 올린 상소.

홍문관 부제학 주세붕(周世鵬)이 상소하였다.

“신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유충(幼沖)하신 때 보위에 오르셨지만 언행이 법도에 맞고 총명하고 슬기가 있어 어느 왕보다 뛰어나신 대다가 학문이 날로 성취되어 일찍부터 사물(四勿)을 일삼았고 일관(一貫)을 궁구하셨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박문약례(博文約禮)한 선비를 가려 뽑아 경연(經筵)에서 모시도록 해야 마땅합니다.<하략>”

四勿, 一貫, 博文約禮

4)인조 23(1645년 淸순치(順治) 2년)년 11월 8일 丙辰

전 지중추부사 조익이 상소하여 학문 강마에 힘쓸 것을 청하다.

전 지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전략>

대저 한 사람의 마음은 착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데, 만약 이 점에 대해 다스려 나가지 않고 희미한 도심은 희미한 대로, 위태로운 인심은 위태로운 대로 그냥 방치하여 둔다면 사람마다 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서 악인이 되고 맙니다. 때문에 성인이 이 점에 대해 방도를 만들어서 다스렸으니 ‘정하고 한 결 같이 하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둘에 대한 좋음과 나쁨의 나뉨을 알고 나서 다시 인심을 제재하고 도심을 길러 희미한 도심을 일으켜 세워 주도하게 하고, 위태로운 인심을 억눌러서 지시에 따르게 해야 하는데, 이를 제대로 다하는 자는 성인이 되고 이를 지키는 자는 현인이 됩니다. 여기에서 인도(人道)가 확립되어 천지(天地)의 도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후세의 성현 공부에 있어서 공자의 박문약례(博文約禮), 증자의 격치 성정(格致誠正), 자사·맹자의 명선성신(明善誠身), 정자·주자의 이른바 거경궁리(居敬窮理)도 그 요점은 모두 인심을 억제하고 도심을 확립시키는 것이고, 그 일은 모두 정하고 한결같은 두 단서에 대한 공부입니다.

如孔子之博文約禮,

박문약례(博文約禮)란 말은 논어에 3번 나오는데 옹야(雍也)편 25장과 안연(顔淵)편 15장에도 같은 말이 거듭 나온다.

子曰 君子博學於文이요 約之以禮면 亦可以弗畔(叛)矣夫인저

(공자 曰 군자가 문(文)에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道)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에 정명도(程明道)가 설명하길 널리 문(文)을 배우고 예(禮)로 요약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만(汗漫)함에 이를 것이니, 널리 배우고 또 능히 예(禮)를 지켜 법도를 따르면 또한 도(道)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약(約)은 요약함이고, 반(畔)은 위배됨이다. 군자는 배움을 널리 하고자 하므로 문(文)에 있어서 고찰하지 않음이 없고, 지킴은 요약하고자 하므로 그 행동을 반드시 예(禮)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도(道)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다산(茶山)은 박학(博學)하면 넘치지 않을 수 없어 선왕(先王)의 도(道)를 쉽게 배반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법(禮法)으로써 이를 단속하고자 한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주자(朱子)는 약지(約之)를 군자(君子) 자신의 지킴[守]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양백준(楊伯峻)은 약지(約之)의 지(之)가 문(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모기령(毛奇齡)의 설(說)을 따라 설명하기를 박(博)과 약(約)은 두 가지 일이고, 문(文)과 예(醴)도 두 가지 물건이어서 자한(子罕)편에서 말한 博我以文 約我以禮(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실을 요약하게[묶게] 해 주셨다.)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자한(子罕)편에서 말한 박약(博約)은 문(文)과 예(禮)로 안회(顔回)를 박약(博約)하는 것이고, 여기서의 박약(博約)은 예(禮)로 문(文)을 제약하고, 약(約)으로 박(博)을 제약하는 것이다. 널리 배울 바[博]는 문(文)에 있고, 문(文)을 요약할 바[約文]는 또 예(禮)에 있는 것이다. 라고 했다.

모기령(毛奇齡)이 생각하는 약지이례(約之以禮)의 지(之)는 문(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풍부한 것을 거쳐서 간략한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주자(朱子)도 약아이례(約我以禮)의 약(約)을 묶어 단속하다로 보아서 약지이례(約之以禮)와는 달리 해석했다. 왜냐하면 나를 요약한다는 말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과 비슷한 박아이문(博我以文)이란 말은 자한(子罕)편 10장의 말로

顔淵이 喟然歎曰 仰之彌高하며 鑽之彌堅하며 瞻之在前이러니 忽焉在後로다. 夫子循循然善誘人하사 博我以文하시고 約我以禮하시니라. 欲罷不能하여 旣竭吾才호니 如有所立이 卓爾라 雖欲從之나 末由也已로다.

(안연(顔淵)이 크게 탄식하며 말하길 “<부자(夫子)의 도(道)는>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며, 바라봄에 앞에 있더니 홀연히 뒤에 있도다. 부자(夫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시고, 예(禮)로써 나의 행실을 요약하게[묶게] 해주셨다. <공부를>그만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 없어서 이미 나의 재주를 다하니, <부자(夫子)의 도(道)가> 마치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비록 이것을 따르고자 하나 말미암을 데가 없도다.”)

이 문장에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하기를 위(喟)는 탄식하는 소리이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다는 것’은 미칠 수 없는 것이요,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는 것’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요,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있는 것’은 황홀하여 어떻게 형상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안연(顔淵)이 부자(夫子)의 도(道)가 무궁무진하고 또 방소(方所)의 형체가 없음을 깊이 알고 감탄하신 것이다. 순순(循循)은 차서(次序)가 있는 모양이다. 유(誘)는 이끌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문(文)으로써 지식을 넓혀주고, 예(禮)로써 행실을 요약하게 함은 가르침의 순서이다. 부자(夫子)의 도(道)가 비록 높고 묘하나 사람들을 가르침에 순서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탁(卓)은 우뚝 서 있는 모습이다. 말(末)은 없음이다. 이는 안자(顔子)가 그 배움에 이른 경지를 스스로 말한 것이니, 기쁨이 깊고 힘씀이 극진하여 도(道)를 봄이 더욱 가까우나 또한 그 힘을 쓸데가 없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후중량(侯仲良)이 말하길 문(文)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주었다는 것은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이요, 예(禮)로써 나의 행실을 요약하게 해주었다는 것은 극기복례(克己復禮: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로 돌아감.)이다. 라고 했다.

또 양시(楊時)가 말하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선인(善人)에서부터 차례로 대인(大人)에 이르기까지는 역행(力行)을 쌓아서 될 수 있지만 대인(大人)에서 화(化)한 성인(聖人)은 역행(力行)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안자(顔子)가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유이다. 라고 했다.

정이천(程伊川)이 말하길 이는 안자(顔子)가 성인(聖人)을 일컬음에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부분이다.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침은 오직 이 두 가지일 뿐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공부가 더욱 어려우니, 바로 벼랑처럼 준절(峻絶)하고, 또 매우 힘을 써서 노력을 해도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이 말은 안자(顔子)가 공자(孔子)를 깊이 알고 잘 배운 것이다. 라고 했다.

호인(胡寅)이 말하길 안자(顔子)가 <앞에>아무 일이 없이 깊이 감탄하였으니, 이는 안자(顔子)가 배움에 이미 터득한 바가 있었으므로, 먼저 어려웠던 까닭과 뒤에 터득하게 된 연유를 말씀하고 그 공(功)을 성인(聖人)에게 돌린 것이다. 높고 견고하며 앞에 있고 뒤에 있다는 것은 도(道)의 본체(本體)를 말한 것이요, 우러러보고 뚫으며 바라보고 홀연하다는 것은 그 요점(要點)을 알지 못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차근차근히 잘 이끄시어 먼저 나를 문(文)으로써 박학(博學)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고금(古今)의 역사를 알고 일의 변고를 통달하게 해주셨고, 그런 뒤에 나의 행실을 예(禮)로써 요약(要約)하게 하시어 나로 하여금 배운 것을 높이고 아는 것을 행하게 하여, 마치 길을 떠난 자가 집으로 돌아오고 밥을 먹는 자가 배부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게 하셨다. 이 때문에 그만 두고자 해도 그만둘 수가 없어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조금도 쉬지 않았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자(夫子)의 선 바가 우뚝함을 보고 따르고자 하였으나 말미암을 데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따르는 바를 게을리 하지 않아 반드시 우뚝이 서 있는 경지에 이르기를 구한 것이다. 라고 했다.

첫 번째 기사는 어린 명종(明宗)에게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인 주세붕(周世鵬)이 권학(勸學)을 촉구하는 상소 중에서 논어의 이 박아이문(博我以文)을 인용한 것이다. 주세붕은 일찍이 풍기군수로 재직할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을 세워서 유학(儒學)을 체계적으로 교육시킨 분이다.

두 번째 기사는 명종(明宗)이 불러도 오지 않는 현자(賢者)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그리는 율시(律詩)를 짓게 했다는 기사에 사관(史官)이 주(註)를 달기를 퇴계가 박문약례(博文約禮)를 한 사람이라고 적은 것이다.

세 번째 기사는 홍문관 부제학인 주세붕(周世鵬)이 어린 명종(明宗)에게 올린 상소로 명종은 일찍이 예(禮)가 아니면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물(四勿)을 생활화 했으며, 인(仁)으로 나아가는 충서(忠恕)라는 한 가지의 도(道)를 지향하기 위해서 박문약례(博文約禮)한 선비를 뽑아 경연(經筵)에서 공부를 하면 학문이 날로 성취될 것이란 내용이다.

이는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한 것이며, 어린 명종의 눈높이 교육은 당장에 학습하고 있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상소는 어린 임금을 성군(聖君)으로 만들기 위한 학문적인 가르침을 포함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까지 그 내용에 제한이 없어서 임금이나 신하의 비리(非理)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었기에 조선이란 국가가 5백년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상소에 나오는 3가지 말(四勿, 一貫, 博文約禮)은 유학의 핵심으로서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 말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예(禮)로 귀결시킨다는 말이고, 일이관지(一以貫之)란 인(仁)을 충(忠)과 서(恕)로 표현하여 내 마음 속에서 천명을 오롯이 받아 인(仁)으로 채우게 하는 것이 충(忠)으로 나타나고, 또 남을 대함에 있어서 남도 나와 하나라는 한마음으로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서(恕)라고 풀이하여 결국은 인(仁)으로 일관(一貫)한다는 말이며, 박문약례(博文約禮)는 그 인(仁)과 예(禮)를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 박학어문(博學於文)하고 약지이례(約之以禮)하라는 말이므로 세밀히 풀어서 보면 유학을 매우 심오하고 축약시킨 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기사에서 중추부 지사(知事) 조익(趙翼)이 올린 상소는 인조(仁祖)에게 학문 강마에 힘쓰라는 것인데, 인심(人心)은 유위(惟危)하고 도심(道心)은 유미(惟微)하니 모름지기 정(精)하게 하고 한 결 같이 하여야 비로소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라면서 이 박문약례(博文約禮)와 격물(格物) 치지(致知)와 경성(敬誠)으로 거경궁리(居敬窮理)할 것을 주문한 것으로 지극히 온당한 말이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행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지난(至難)한 공부라서 만년의 인조(仁祖)가 이 상소를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이 해는 청국(淸國)에 9년간 인질로 가 있던 아들인 소현세자가 2월 18일 돌아와 소용 조씨의 모함으로 인조(仁祖)와의 갈등으로 4월 26일에 급서(急逝)하여 독살설(毒殺說)이 나오는 등 가족사적으로 불행한 나날을 겪고 있었을 때였으니 이런 저런 것들을 모두 잊고 학문 연마에 힘쓰라고 한 상소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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