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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이야기 > 백천 조선왕조 베스트셀러 <논어>
백성을 해치는 자를 통쾌히 소탕하라는 전지를 내리소서제91화(話) 거1우3우반(擧一隅三隅反)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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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25  09: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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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명종 12년(1557 丁巳 / 明 가정(嘉靖) 36년) 5월 7일(己未)

단양 군수 황준량이 올린 민폐 10조의 상소문.

단양 군수(丹陽郡守) 황준량(黃俊良)이 상소를 올려 민폐 10조를 진달하기를, <전략>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 지방을 보아 제로(諸路)를 미루어 살피시고 한 사물을 들어 만 가지를 통찰하소서. 임금 노릇하기가 쉽지 않고 백성 보호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생각해서 어진 정사를 베풀어 백성의 고통을 보살피고 부세를 박하게 하여 민생을 후하게 해주고 사치를 고쳐 백성의 재물을 아끼고 공사(工事)를 감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무거운 부세를 감면해 주고 포흠낸 백성을 독책하지 말고 정도(正道)를 좀먹고 백성을 해치는 자를 통쾌히 소탕하라는 전지를 내리시고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하는 계책을 극진히 강구하여 국가의 운명을 편안하게 해서 와해(瓦解)되는 걱정이 없게 하고 나라의 근본을 공고하게 해서 반석같이 튼튼하게 한다면 어찌 한 고을과 한 나라의 경사일 뿐이겠습니까? 실로 만세토록 이어갈 종사(宗社)의 무궁한 복인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어리석고 미천한 몸으로 아둔한 소견을 두서없이 함부로 진달하였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소원하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니, 한 고을의 폐단을 진달함에 삼우(三隅)를 아시기 바랍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신의 어리석음을 가엾게 여기시어 참람됨을 용서하여 주소서. 신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상소를 받들어 올립니다.”

望三隅之反.

2)영조 17(1741년 淸건륭(乾隆) 6년)년 3월 18일 癸未

원경하가 과거에 합격한 인재를 임용하지 않는 폐단과, 참다운 탕평의 도를 아뢰다.

임금이 친히 유생의 강독을 시험하였는데, 어느 한 유생이 강석(講席)에 들어와 스스로 불통(不通)이라고 쓰고 물러나므로,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그가 합격한 사람의 수효가 많아서 강독해도 보탬이 없다고 말하였다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유학(遊學)하면서 공업(工業)을 익히고, 편안한 마음으로 진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이는 귀중하게 여길 만하다. 비록 한 가지 작은 재주라도 나는 혹시 그가 세상에서 버려진 진주인 듯하다.” 하자, 수찬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버려진 진주라는 하교는 진실로 인재를 애석하게 여기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먼 시골의 유생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윤락(淪落)한 대로 맡겨둔 채 거두어 임용하지 않고 못하고 있으니, 팔방(八方)에 버려진 진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 강독하는 유생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가까운 데에서 미루어 먼 곳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또한 넉넉히 반우(反隅)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亦足爲反隅之道也.

이 말은 술이(述而)편 8장의 말로

子曰 不憤이어든 不啓하며 不悱(비)어든 不發호되 擧一隅에 不以三隅反이어든 則不復(부)也니라.

(공자 曰 마음속으로 알아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으나 한 귀퉁이를 들어 보여줌에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반증(反證)하지 못하거든 다시 더 이상 알려주지 않는다.)

이 말에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하기를 분(憤)은 마음에 통하려고 하나 되지 않아 애태우는 뜻이요, 비(悱)는 입으로 말하려고 하나 능하지 못하여 애태우는 모양이다. 계(啓)는 그 뜻을 열어줌을 이르고, 발(發)은 그 말문을 열어줌을 이른다. 네 귀퉁이가 있는 물건은 그 하나만 들면 나머지 세 귀퉁이는 알 수 있다. 반(反)은 서로 증거하는 뜻이다. 부(復)는 다시 말해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

앞장(章)의 말이 自行束脩以上은 吾未嘗無誨焉이로다.(포(脯) 한 속(束) 이상을 가지고 와서 집지(執贄)의 예(禮)를 행한 자에게는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말에 이어서 이와 같은 교수(敎授) 방법을 말한 것이니, 이 두 문장을 연결해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이미 성인(聖人)이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음을 말했고, 이로 인하여 함께 이 말을 기록해 놓아서 배우는 자들이 힘을 씀에 부지런히 하여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정이천(程伊川)이 말하길 분비(憤悱)는 성의(誠意)가 안색과 말에 나타나는 것이니, 성의가 지극하기를 기다린 뒤에 알려주고, 알려주었으면 또 반드시 스스로 터득하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다시 알려주는 것이다. 분비(憤悱)함을 기다리지 않고 말해주면 이는 견고하지 못하고, 분비(憤悱)하기를 기다린 뒤에 알려주면 확연히 깨달을 것이다. 라고 했다.

수(脩)는 포(脯)이니 10개를 속(束)이라 한다. 옛날 서로 만나 볼 적에 반드시 예물(禮物)을 들고 가서 예의(禮儀)로 삼았으니, 한 속(束)의 포는 지극히 작은 것이었다.

예기(禮記) 곡례하(曲禮下)편에 무릇 폐백은 천자(天子)는 울창(鬱鬯)이고, 제후(諸侯)는 명규(命圭)이고, 경(卿)은 고(羔: 새끼 양)이고, 대부(大夫)는 안(鴈: 기러기)이고, 사(士)는 꿩[雉]이고, 서인(庶人)은 집오리이다. 그리고 부인의 폐백은 구(椇: 호깨나무 적대)와 개암[榛]과 포(脯)와 수(脩: 긴 포)와 대추와 밤이다. 라고 했다.

사람이 태어날 적에 똑같이 이 이성(理性)을 갖추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사람에 대하여 선(善)하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었으나, 다만 상대방이 찾아와서 배울 줄을 모르면 가서 가르쳐 주는 예(禮)는 없었다. 예기(禮記)의 곡례상(曲禮上)편에 예(禮)는 와서 배운다는 말은 들었고, 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고 했다. 그래서 만일 예(禮)를 갖추고 찾아오면 가르쳐주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신 것이다.

배움에 간절히 목말라 할 때 가르쳐 주어야 학습 효과가 있는 것이지 배울 의지가 없는데도 따라가서 가르쳐 주어 봐야 학습 효과는 없을뿐더러 예(禮)가 아닌 것이다.

첫 번째 기사는 황준량(黃俊良) 선생이 민폐 10조를 올린 한 귀퉁이를 들어 보인 것 뿐이니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짐작하란 상소문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황준량(黃俊良)은 1517(中宗12)∼1563(明宗1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사온서주부 영손(永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효동(孝童)이고, 아버지는 치(觶)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黃漢弼)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했다. 1537년(中宗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그 뒤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했다. 1544년 학정, 1547년(明宗2) 박사에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 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 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했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했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賑恤)해 소생하게 했다. 또한 전임관(前任官)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負債文券)은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特恩)을 받기도 했다. 이 상소가 바로 그것이다. 그밖에도 목민관으로서의 많은 치적을 남겼다. 우애가 돈독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청빈한 생활을 했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遂良)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과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됐으며,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두 번째 기사는 영조가 친히 유생의 강독을 시험하였는데, 어느 한 유생이 강석(講席)에 들어와 스스로 불통(不通)이라고 쓰고 물러나므로, 임금이 이상하게 여겨 여러 신하들에게 ‘제가 왜 저러지?’ 하면서 모두들 임금 앞에서 열심히 강(講)을 하여 급제(及第)를 하려고 하는데, 유독 그 유생만은 이미 급제자가 많아서 새삼 수고롭게 강(講)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강(講)을 하기도 전에 스스로 불통(不通)이라고 적어 넣고 나와 버린 그 돌출 행동을 한 그가 임금 앞에서도 소신대로 행동한 그가 숨은 진주인 듯 하니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자, 수찬(修撰) 이성중(李成中)이 말하기를,

“먼 시골의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도 임용하지 않고 못하고 있으니, 팔방(八方)에 버려진 진주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약 강독하는 유생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을 가까운 데에서 미루어 먼 곳에까지 미치게 한다면, 또한 넉넉히 반우(反隅)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라면서 임용의 단초를 열어 보이는 거일우(擧一隅)를 하면 저절로 3귀퉁이를 반증(反證)하는 반우(反隅)가 이뤄질 것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반우(反隅)란 한 귀퉁이를 들어 보여주면 나머지 세 귀퉁이를 반증(反證)한다는 말이다. 이 말이 확대 해석되어 우리 속담에도 작은 단서만 알면 그 나머지도 같을 것이란 가정 하에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그 전체 중에 하나의 모퉁이만 들어 보면 나머지도 다 같다는 말로 쓰이는데, 이 기사에서는 영조에게 수찬(修撰) 이성중(李成中)이 임용의 폭을 넓혀서 과거에 급제하고 임용을 못하고 대기하는 자들 중에서도 숨은 진주를 골라서 쓴다면 반우(反隅)가 되어 그 유생(儒生)처럼 급제하는 것을 헌 신짝 취급은 안 할 것이란 뜻으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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