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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이야기 > 백천 조선왕조 베스트셀러 <논어>
곡을 하였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제92화(話) 곡즉불가(哭則不歌)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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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02  10:3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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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종 16년(1485 乙巳 / 明 성화(成化) 21년) 3월 8일(己丑)

담제 날의 하례를 권정례로 하자는 노사신의 논의를 따르다.

담제(禫祭) 날에 하례를 받는 것이 적당한지를 의논하게 하였다. 노사신(盧思愼)이 의논하기를,

“공자(孔子)가 그 날 곡(哭)하면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면, 하루 안에 곡하고 하례를 받는 것은 참으로 미안하나, 담제 뒤에 하례는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하는 일이므로 아주 폐지할 수 없으니, 권정례(權停禮: 절차를 다 밟지 않고 거행하는 의식)로 하례를 올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以子於是日哭則不歌觀之, 一日之內, 哭而受賀, 實未安. 然禫後賀禮, 乃臣子爲上之事, 不可全廢. 請以權停禮, 進賀.” 從之.

2)연산군 1년(1495 乙卯 / 明 홍치(弘治) 8년) 11월 5일(甲申)

경연 참여, 외척 등용,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의 속록 작성 등을 의논하다.

경연에 나갔다. 특진관 권경희(權景禧)와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이 아뢰기를, <전략>

아조에서는 왕자군(王子君)의 복상(服喪)하는 것이 군신(群臣)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해서도 삼년상을 입는데, 더구나 왕자는 선왕에 대하여 의리가 임금과 어버이를 겸하고 있는데도 졸곡(卒哭)이 겨우 지나면 일체 복을 벗고, 술 마시며 고기 먹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니, 지금 복을 도로 입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예(禮)에 어긋나는 것이 심합니다. 또 공자(孔子)는 그날 곡을 하였으면 노래를 부르지 않았는데, 지금 백관들은 영사전(永思殿)에서 배제(陪祭: 임금을 모시고 제사를 지냄.)한 뒤에 상복을 몸에 걸치고서도 태연히 고기를 먹으니, 곡읍(哭泣)한다는 것이 다만 가식[虛文]일 뿐입니다. 신이 근일 배제하는 반열에 섰다가 이런 것을 보고 마음에 견디지 못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삭망(朔望) 일에는 고기를 사용하지 말도록 금령(禁令)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조종조로부터 그렇게 해 온 것이니, 새로 금령을 만들 수는 없다.”하였다.

孔子於是日哭則不歌.

3)중종 8권, 4년(1509 己巳 / 明 정덕(正德) 4년) 3월 15일(丁未)

조강에 나가, 전세 반감·경환상 선릉과 헌릉 배알 및 주악 문제를 논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특진관 이손(李蓀)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선릉(宣陵: 성종 릉)과 헌릉(獻陵: 태종 릉)의 전성(展省: 왕의 성묘)을 명하여 물려 행하게 하셨다 합니다.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랬는데 아직까지 친제(親祭)하지 못하셨으니, 한갓 상의(上意)에 미안하실 뿐 아니라, 신민의 바람도 또한 결여되옵니다. 그리고 각진(各津)의 부교(浮橋)가 이미 완성되었는데, 철거하였다가 다시 설치하자면 이것 또한 큰 폐단이니, 속히 행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전년 건원릉(建元陵: 태조의 릉)에 친제한 뒤 환가(還駕)할 때 중로에서 주악(奏樂)한 것을 신은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자는 이날에 곡을 하면 노래하지 않았다.’ 했습니다. 즉위하신 뒤 배릉(拜陵)하는 것이 비록 길한 일이긴 하지만, 상하가 모두 담복(淡服: 엷은 청색 의복)을 입고 제사하였으니, 신의 뜻으로는 마땅히 주악하지 말아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성종조의 고사라 하더라도 반드시 본받을 것이 아니니, 청컨대 대신과 더불어 예문을 고정(考定)하소서.” 하였다.

古人云: ‘子於是日, 哭則不歌.’ 卽位後拜陵, 雖是吉事, 上下皆淡服而祭, 臣意不宜奏樂.

4)명종 22권, 12년(1557 丁巳 / 明 가정(嘉靖) 36년) 3월 4일(丁巳)

건원릉과 현릉에 행행하여 음악을 연주하다.

상이 건원릉(健元陵: 태조릉)과 현릉(顯陵: 문종릉)에 행행하였다. 참포(黲袍)에 오서대(烏犀帶)를 띠고서 제사를 마친 뒤에 융복(戎服)을 입고 말을 타고 송계(松溪)【양주(楊州) 땅】에 이르러 대주정(大晝停)하였는데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호종(扈從)하는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상께서 타신 말이 잘 달리므로 호종하는 신하들이 모두 미처 따르지 못하니, 위의(威儀)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저녁에는 일세(日勢)를 봐가면서 하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선왕의 능침에 전알(展謁)하였으니, 선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상이 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벗고 옥색포(玉色袍)를 입었으니 의복이 이미 바뀐 것이다. 의복이 바뀌었으면 마음도 변하는 것이다. 하루 사이에 남은 슬픔이 다하지 않았을 것이니 융복을 입은 일도 이미 옳지 못하거늘 하물며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겠는가? ‘곡(哭)을 했으면 노래하지 않는다.’는 뜻과는 너무도 다르다.

其異於哭則不歌之意甚矣.

5)광해군 1(1609)년 12월 30일 丁丑

친제와 망궐례의 중복에 대해 좌의정 이항복이 건의하다.

<전략>언젠가 이귀(李貴)에게 장난으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나와 그대는 도(道)가 각기 다르니, 공자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감추고, 그대는 써줘도 행하고 버려도 행하고, 나는 써줘도 감추고 버려도 감춘다.”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중략> 옛날에는 노래 부르고 곡하는 일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아울러 행하는 것은 예가(禮家)에서 금하는 사항입니다. 먼저 경사에 참석한 뒤에 조문하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古者歌、哭不同日, 故吉凶竝行, 禮家所禁.

6)영조 34(1758년 淸건륭(乾隆) 23년)년 2월 26일 壬午

대신들이 휘령전 담제 후의 음악을 쓰는 일을 논의하다.

휘령전(徽寧殿) 담제(禫祭) 후에 음악을 쓰는 일을 수의(收議)하니, 봉조하 김재로(金在魯)는 말하기를,

“무릇 상(喪)에 있어 담제 후에 보통 제사와 같이 음악을 쓰는 것은 예(禮)의 상경(常經)이고, 내상(內喪)이 먼저 있어서 담제 후에도 오히려 조석 상식(朝夕上食)을 행하는 것은 예의 권도(權道)인데, 어찌 권도로 인하여 상경을 폐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은 논자(論者)의 말로서 진실로 고집스러운 바가 있으나, 또한 그러하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공자(孔子)는 이날에 곡(哭)하면 노래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으니, 남은 슬픔을 잊지 못함인데, 하물며 같은 궁전 안에서 한편에서는 곡하고 한편에서는 음악을 쓴다면 이 같은 예문(禮文)은 결단코 없을 것입니다. 예의 뜻으로 말하면, 담제 후에 비록 상식을 그대로 행한다 하더라도 곡하지 아니하고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큰 제사에 이르러서는 사체가 상식에 비하여 더욱 중한데, 더욱이 곡하면서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음악을 쓰지 아니할지라도 곡하지 아니함으로써 의주(儀注)를 마련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상식과 대제를 모두 곡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마련하면, 대제에 음악을 쓰는 것이 불가하지 아니할 듯합니다.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 예에 3년을 장가들지 아니하는 것은 달자(達子: 達孝)의 뜻인데, 일은 비록 같지 아니하더라도 예는 방조(旁照)할 만합니다. 왕세자는 아직 심제(心制)를 가졌으니, 27개월을 한정하여 본전(本殿) 큰 제사에 잠시 악을 쓰지 말고, 27개월을 지낸 뒤에 예에 의하여 음악을 쓰는 것이 아마도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子於是日, 哭則不歌’,

이 말은 논어 술이(述而)편 9장의 말로

子食於有喪者之側에 未嘗飽也러시다. 子於是日에 哭則不歌러시다.

(공자께서는 상(喪)이 있는 자의 곁에서 음식을 먹을 적에 일찍이 배불리 먹은 적이 없으셨다. 공자께서는 이 날에 조곡(弔哭)을 하시면 노래를 부르지 않으셨다.)

일찍이 배불리 먹은 적이 없었다는 것은 상(喪)에 임하여 슬퍼하여 달게 먹을 수가 없어서 먹어도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곡(哭)은 조상(弔喪)하여 곡함을 이르니, 그 날 하루 동안에는 남은 슬픔이 잊혀지지 않아서 저절로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사량좌(謝良佐)가 말하길 배우는 사람은 이 두 가지에서 성인(聖人)의 올바른 성정(性情)을 볼 수 있으니, 성인(聖人)의 성정(性情)을 제대로 안 뒤에야 도(道)를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공자 같은 성인(聖人)은 너와 내가 한마음이란 것을 아신 분이라서 네가 아프면 나도 같이 아파하고, 네가 슬프면 나도 같이 슬프니까, 같이 밥을 먹어도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고, 입맛이 없어서 배불리 먹을 수가 없을 것이고, 더구나 조곡(弔哭)을 한 뒤에 바로 기분 전환을 하여 노래를 부를 수가 없이 그 슬프고 마음 아파하는 상주(喪主)와 한마음이 되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는 사소한 것 같아도 그런 사소한 행동들에서 성인(聖人)과 속인(俗人)이 구별되어 지고, 인(仁)과 불인(不仁)이 나눠지는 까닭이다.

그리고 곡(哭)은 문상(問喪)을 가서 조상(弔喪)하며 곡(哭)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조곡(弔哭)을 한 날, 그날 하루 동안에는 남은 슬픔이 잊혀 지지 않아서 저절로 노래를 부를 기분이 아니어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는 것인데, 이것도 전자(前者)의 얘기처럼 한마음이 되었기에 그 슬픔의 여운이 남았는데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닐 뿐 더러 노래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성인(聖人)의 올바른 성정(性情)을 이 문장에서 엿볼 수 있으니, 인(仁)이란 바로 이처럼 너와 내가 하나이자 한마음으로 연결됐다는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므로 불쌍한 사람을 보면 같이 마음 아파하고 즐거우면 같이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인자(仁者)이며 성자(聖者)란 말이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라는 즉 내 욕심의 마음보따리를 비워야 가능하다. 내 것 챙기기에 바쁘고, 내 마음 속에는 천성(天性)보다는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가짜 나라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범인(凡人)들로서는 이해조차 못하는 경지일 것이다.

이로써 성인(聖人)의 올바른 성정(性情)을 볼 수 있다고 한 이 사량좌(謝良佐)의 말에도 어폐가 있는 것이 성인(聖人)의 마음이나 일반 범인(凡人)의 마음이나 다 같은 한마음이란 전제를 무시하고 성인(聖人)은 태어 날 때부터 별종으로 취급하는 오류가 있음이고, 성인(聖人)의 마음은 보다 투명하고 밝아서 본성(本性)에 충실하여 욕심이 없는 마음이므로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게 느끼는 것의 정도가 같아서 인데, 이를 기본 성정(性情)으로 치부해 버리면 도(道)의 본질과는 한참의 상거가 생기고 만다.

하기야 요즘 상가에 문상을 가서 보면 상주(喪主)도 그렇게 애통해 하는 빛도 없고, 더구나 왕성한 식욕으로 아구아구 먹는 것을 볼 때 논어의 이 문장이 무색해 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요즘 우리 주위에서도 애곡(哀哭)을 하는 상가(喪家)를 볼 수도 없으니, 남은 슬픔이 잊혀지지 않아 저절로 노래를 부를 기분이 생기지 않는 다는 말도 머리로는 짐작이 가지만 우리 현실과는 한참 먼 세상의 얘기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첫 번째 기사는 그 전에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담제 때에 곡하는 절차가 있기는 하나, 담(禫)이라는 것을 조용하여 편안하다는 뜻이며, 곧 그 상제(喪制)를 마치는 날이므로 조종조(祖宗朝)부터 하례가 있었으니, 어찌 남의 슬픔이 잊히지 않는다 하여 하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상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 논의 결과 노사신(盧思慎)의 의견을 들어서 담제(禫祭)날의 하례를 절차를 다 밟지 않는 약식 의례인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했다.

두 번째 기사는 사간원 헌납(獻納) 김일손(金馹孫)이 경연(經筵)에서 연산군에게 아뢴 내용은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여 왕자군(王子君)의 복상기(服喪期)가 일반 신료(臣僚)들은 3년임에 반해서 졸곡(卒哭)만 지나면 바로 상복(喪服)을 벗고, 고기를 먹는 것이 예(禮)에 맞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자(王子)들은 바로 아버지의 친상(親喪)임에도 불구하고 1년도 안되어 상복(喪服)을 벗고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이 같은 선왕(先王)의 자녀로서 사리에 맞지를 않고, 또 임금을 모시고 배제(陪祭)를 지낼 때 백관(百官)들이 참례(參禮)하여, 제사를 마치고는 상복(喪服)을 입고 고기를 마구 먹는 모습을 보고 사림(士林)출신의 김일손(金馹孫)은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상중(喪中)에 초하루 보름에 지내는 삭망(朔望)에도 고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령(禁令)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는 말에 대해서 연산군은

“조종조로부터 그렇게 해 온 것이니, 새로 금령을 만들 수는 없다.”고 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연산군은 경연(經筵)에도 나가서 경전을 읽고 학문을 토론하면서 부왕(父王)인 성종의 치적을 닮으려고 애를 썼지만 대간(臺諫)의 입에 재갈을 물리자 간신(奸臣)들이 발호하여 점점 더 광포한 정치로 치달아 갔다.

세 번째 기사에서는 조강(朝講)에서 논어의 이 문장을 갖고 중종이 성묘(省墓)를 하고 돌아오면서 주악(奏樂)을 연주한 것은 이런 공자의 사상과 맞지 않다는 것을 풍간(諷諫)하는 말인데, 이는 경연관(經筵官)의 이 문장을 확대 해석했거나 한마음 사상을 모르고 한 말로 견강부회가 심한 말일 것이다.

조상의 묘소에 성묘(省墓)를 하고 오는 도중에 주악(奏樂)을 연주하는 것과 상(喪)을 당해서 주상(弔喪)을 한 날은 노래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질 자체가 다르다.

물론 배릉(拜陵)하는 성묘(省墓) 행차는 엄숙한 의식이 본질이지만 돌아오는 길에 임금이 직접 노래한 것도 아닌, 피곤한 교군(轎軍)들을 위해 행진곡을 연주한 것까지 이 문장에 결부시켜서 문제 삼는다면 이런 편협한 시강관(侍講官)에게서 뭘 배울 수 있겠는가 하는 딱한 마음과 동정심까지 유발한다.

원래 임금의 행차에는 행렬을 엄숙하고 장엄해 보이며 위의(威儀)를 나타내기 위해서 주악(奏樂)을 연주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마저 막는다면 임금이 몰래 암행 성묘(省墓)라도 하란 말인지 모를 일이다. 오히려 그 이후에 정조(正祖)는 화성 능행에 더욱 거창한 주악(奏樂)을 하면서 행진한 반차도가 남아 있는데, 이를 그 시강관이 보았다면 기절할 일이 아닌가?

네 번째 기사는 명종(明宗)이 태조의 능인 건원능과 문종의 능인 현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전복(戰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달려서 시종들이 따라 잡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점과 양주(楊州)에서 쉴 때는 음악을 연주케 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고 사관(史官)이 꼬집어 놓은 문장에서 논어의 이 문장을 인용하여 공자의 그런 태도와는 너무나 다르다며 임금을 비난하고 있다.

사관(史官)이 볼 때는 임금은 군자(君子)여야 하고 언어행동도 군자처럼 해야 올바른 임금의 상이라고 할 텐데, 명종(明宗)의 입장에서 보면 오랜만에 야외로 나와 태조 할아버지의 능에 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호기가 발동하여 말을 달려 보고, 그 업 된 기분으로 풍악과 술을 마신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이라도 할 것이다.

이렇게 기록해 놓은 사관(史官)이 볼 때는 제복(祭服)을 입고 제관(祭冠)을 쓰고 성묘를 했으면 그 복장 그대로 엄숙히 환궁을 했어야 하고, 중간에서 쉴 때도 근엄하고 침통한 표정을 지어야 처음에 성묘하러 갈 때의 그 심경이 된다고 한 것으로 융복(戎服)으로 갈아입은 것이 이미 마음이 달라져서 그 다음의 행동으로 말을 마구 치달려서 임금으로서의 체통을 잃었음이요, 더 나아가 쉴 때 음악을 연주하고 술을 먹었다는 것은 공자는 일찍이 그처럼 하지 않으신 큰 잘못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사관(史官)의 논리라면 젊은 명종(明宗)은 성묘를 떠날 때 이미 환궁할 때는 스트레스를 날려 보려고 융복(戎服)과 말과 악공들과 술을 준비해서 갔던 것인데, 그렇다면 성묘(省墓)하는 마음가짐이 애초부터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정조(正祖)의 화성 행궁 반차도나 그때 그린 어진(御眞)을 보더라도 임금이 원행(遠行)을 거둥할 때는 활동하기에 편한 융복(戎服)을 입고 다녀오는 것이 흠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관(史官)의 착각은 성묘(省墓)와 초상(初喪)을 동격으로 보는 데 있다. 어찌 보면 혈기 왕성한 명종(明宗)은 태조 할아버지 산소에 인사드리러 가는 것 자체가 설레는 축제(祝祭)로 느꼈을 수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답답한 궁궐을 나와서 야외로 성묘(省墓)를 가는 행차가 침울하고 엄숙함 보다는 신나고 호기를 발산할 기회로 삼았던 것을 간과한 것이다. 당일 성묘(省墓)를 했다고 하루 종일 노래도 못 부르고 식욕이 떨어져야 된다는 자체가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편견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따라 갔던 사관이 명종(明宗)이 말을 달려 앞서 나가자 이를 뒤쫓아 뛰어 오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승정원(承政院)에서 그러면 체통(體統)을 지키지 못하니 천천히 위의를 갖춰서 행차하라고 아뢴 말에 이어서 이런 평을 해 놓은 것을 보면 그 장면이 생생히 그려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섯 번째 기사는 백사 이항복이 이귀(李貴)와 말장난한 것까지 예로 들면서 광해군의 주의를 집중시킨 뒤에 본론인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같이 할 수 없음을 논어의 이 문장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는 장면이다.

여섯 번째 기사는 정성왕후(貞聖王后)의 담제(禫祭)후 큰 제사 때 음악을 쓸 수 없다는 것을 대신들이 아뢴 말 중에서 논어의 이 문장을 인용하여 곡(哭)과 음악을 같이 할 수 없다는 논리로 삼은 것이다.

휘령전(徽寧殿)은 창경궁의 문정전(文政殿)인대 주로 왕비의 상(喪)을 당하면 재궁(梓宮)이나 상기(喪期)를 마치면 임금이 죽어서 종묘에 들 때 까지 혼전(魂殿)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곳은 영조38년인 1762년 5월 소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현장이기도 하다. 이 기사에서 말하는 휘녕전(徽寧殿)은 영조의 원비(元妃)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로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肅宗18)년에 태어나서 1757(英祖33)에 죽었다. 1704년(肅宗30) 숙종의 제4왕자인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景宗1) 경종이 몸이 약하고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世弟)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의 즉위에 따라 왕비에 진봉되었다. 시호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단목장화정성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이고, 능호는 홍릉(弘陵)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일 수밖에 없는 궁색한 이유로 든 것이 바로 이 정성왕후의 혼령이 사도세자를 죽이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기록이 나온다.

담제(禫祭) 혹은 담사(禫祀)란 3년의 상기(喪期)가 끝난 뒤 상주가 평상으로 되돌아감을 고하는 제례의식이다. 일반적으로 부모상일 경우 대상(大祥) 후 3개월째, 즉 상(喪) 후 27개월이 되는 달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에 지낸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위하여 지내는 담제는 상(喪) 후 15개월 만에 지내는데, 즉 소상(小祥) 후 2개월째가 된다. 지난 해 4월 3일 죽은 정성왕후의 담제는 이해 7월에나 지내게 되는데, 미리 이 문제를 논의시킨 것이다. 담제(禫祭) 때가 되면 하루 전날 목욕하고 제상(祭床)을 차린 뒤 상복을 담복(禫服: 검은 씨줄에 흰 날줄로 짜서 만든 천으로 지은 옷. 현재는 素服으로 대신함)으로 갈아입는다. 날이 밝으면 행사하는데 의식과 절차는 대상 때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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