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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이야기 > 백천 조선왕조 베스트셀러 <논어>
학문을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방법제93화(話) 호모이성(好謀而成)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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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2  19:2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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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조 14(1581)년 4월 1일 甲午

대도의 요체·시무의 득실·생민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성혼의 상소문

<전략> 사람은 반드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병통의 소재부터 파악하여 유여한 것은 줄이고 부족한 점은 보충하는 것인데 사람마다 법이 다른 것으로 당초부터 정본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공자가 안연(顔淵)에게는 사물(四勿)을 말하고 중궁(仲弓)에게는 경서(敬恕)를 말하여 뜻이 달랐으며, 중유(仲由)에게는 억제시키고 염구(冉求)에게는 권장하여 가르침이 달랐으니, 사람에 따라 같지 않은 것이 이렇기 때문에 반드시 절실하게 묻고 사물의 이치를 생각하며, 학문의 요점을 알고 병통에 대한 치료를 가하여 자기에게 절실한 공부를 해야만 이에 의거하여 정일집중(精一執中)하는 학문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아름다운 자질을 가졌다 하더라도 성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략>

四勿, 仲弓 敬恕. 抑其勇而敎之

2)선조 19(1586)년 10월 1일 壬戌

주학 제독관으로 제수된 조헌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전략> 갖추어졌으며, 몸을 닦고 정치를 하는 도는 성학집요(聖學輯要)에 자세하게 기술하여 성상의 질문에 메아리처럼 답하였으니, 이 어찌 스스로의 힘을 요량하지 못한 자이겠습니까. 공자가 ‘일에 임하여 신중하게 계획하는 자와 함께 하겠다.’고 한 가르침은 자로(子路)의 ‘삼군(三軍)을 움직일 때 누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하여 그의 지나치게 강한 <하략>

臨事而懼, 好謀而成者, 子路曰 子行三軍, 則誰與.

3)광해군 1(1609)년 12월 30일 丁丑

친제와 망궐례의 중복에 대해 좌의정 이항복이 건의하다.

<전략>언젠가 이귀(李貴)에게 장난으로 말하기를 “공자(孔子)와 나와 그대는 도(道)가 각기 다르니, 공자는 써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감추고, 그대는 써줘도 행하고 버려도 행하고, 나는 써줘도 감추고 버려도 감춘다.” 하였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중략> 옛날에는 노래 부르고 곡하는 일을 같은 날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아울러 행하는 것은 예가(禮家)에서 금하는 사항입니다. 먼저 경사에 참석한 뒤에 조문하는 것도 옛사람은 오히려 불가하다고 말하였습니다.

孔子及吾與汝, 道各異焉, 孔子用則行, 舍則藏, 君用亦行, 舍亦行, 吾用亦藏, 舍亦藏.

4)영조 26(1750년 淸건륭(乾隆) 15년)년 7월 3일 癸卯

홍화문에 나아가 양역(良役)에 대해 하유하고, 유생 등이 의견을 아뢰다.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양역의 편부를 묻고 임금이 대소 신료(臣僚)와 사서(士庶) 및 백성들에게 하유하기를, <전략> <균역법에 대해서>

무슨 법이건 처음에는 좋지 않은 것이 없으나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삼대(三代)때에 충후(忠厚)와 질실(質實)과 문채(文采)를 가감(加減)한 것도 모두 이런 뜻에서였다. 이제는 계획도 상세하게 검토되었고 두서도 이미 가려졌지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일에 다다라서는 두렵게 여기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하여 성취시킨다.’고 하였으니, 두렵게 여긴다는 것은 조심하는 것이고, 계책을 충분히 검토한다는 것은 중지(衆知)를 모은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삼복(三伏)의 더위를 맞아 또 백성 앞에 나선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중략>

이미 옛날부터 열성(列聖)의 뜻은 간절하였지만 임금의 뜻을 받드는 신하가 없어서 지금까지 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변통하려고 한 것은 실로 백성을 위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 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님을 너희는 이해하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병(兵)을 버리고 먹을 것을 버릴지언정 신(信)은 못 버린다. 신이 없으면 서지 못한다.’고 하였다. 내가 이미 한 필(疋)을 감하겠노라고 말을 하였는데 어떻게 백성에게 차마 실신(失信)이야 하겠는가? <중략>

子曰, ‘臨事而懼, 好謀而成’, 臨事而懼, 卽謹愼也, 好謀而成, 取群議也.

이 말은 술이(述而)편 10장의 말로

子謂顔淵曰 用之則行하고 舍(捨)之則藏을 惟我與爾 有是夫인저. 子路曰 子行三軍이면 則誰與시리잇고? 子曰 暴(포)虎憑(빙)河하여 死而無悔者를 吾不與也니 必也臨事而懼하며 好謀而成者야니라.

(공자께서 안연(顔淵)에게 말하길 써주면 도(道)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을 오직 나와 너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자로(子路)가 말하길 “부자(夫子)께서 삼군(三軍)을 통솔하신다면 누구와 함께 하시렵니까?” 공자 曰 맨손으로 범을 때려 잡으려하고, 맨몸으로 강하(江河)를 건너려 하여 죽어도 후회함이 없는 자를 나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며(조심하며) 도모하기를 좋아하여 성공하는 자와 함께 할 것이다.)

이 문장에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하길 12,500명을 1군(軍)이라 하니, 제후국의 큰 나라는 삼군(三軍: 37,500명)을 둔다. 자로(子路)는 공자(孔子)가 유독 안연(顔淵)만을 찬미(讚美)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용맹을 자부(自負)하여 공자(孔子)께서 만약 삼군(三軍)을 출동하신다면 반드시 자기와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포호(暴虎)는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는 것이고, 빙하(憑河)는 맨몸으로 강하(江河)를 건너는 것이다. 구(懼)는 그 일을 공경함을 이르고, 성(成)은 그 계책을 이룸을 말한다. 이것을 말한 것은 모두 자로(子路)의 용맹을 억제하여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다[皆以抑其勇而敎之]. 그러나 군대를 출동하는 요점이 실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자로(子路)는 이것을 알지 못했다. 고 했다.

윤돈(尹焞)이 말하길 써주거나 버리는 것은 나에게 관여됨이 없고, 도(道)를 행하거나 은둔하는 것은 만나는 상황에 편안히 처하는 것이니, 운명은 도(道)에는 부족하다. 안자(顔子)는 성인(聖人)에 가까웠기 때문에 또한 이에 능하신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사량좌(謝良佐)가 말하길 성인(聖人)은 행(行: 세상에 나와 도(道)를 행하는 것)과 장(藏: 은둔하여 숨는 것)의 사이에 뜻함도 없고 기필(期必)함도 없어서[毋必], 도(道)를 행함이 자리나 지위를 탐하는 것이 아니요, 은둔함이 자기 혼자만 선(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욕심이 있다면 등용해주지 않는데도 행해지기를 구하고, 버리는데도 은둔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안자(顔子)만이 이에 참예할 수 있는 것이다. 자로(子路)는 비록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나 집착함과 기필(期必)함이 없지 않았고, 삼군(三軍)을 출동함을 가지고 질문함에 이르러서는 그 의론이 더욱 비루(鄙陋)하다. 공자(孔子)의 말씀은 그의 잘못을 인하여 바로잡으신 것이다. 도모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고, 조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하는 것은 작은 일에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삼군(三軍)을 출동하는 일에 있어서랴? 라고 했다.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작전(作戰)이 매우 중요하다. 호모(好謀)란 치밀한 기획과 계획으로 이뤄진 필승 작전을 말한다. 이는 기업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로 목표 달성을 위한 기획(企劃) 전략(戰略)과 전술(戰術)이 그 사업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성공하는 기업은 첫째 아이템을 잘 잡아야 하고, 그 잡은 아이템을 여하히 살리느냐에 성패가 나뉘는데, 그러기 위해서 전략 기획 업무가 업무적으로는 스탭 기능이지만 거기서 수립된 기획안들이 바로 라인 작업에 시행되므로 모든 기업에서 전략 기획 파트를 중시한다. 즉 호모(好謀)를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부서이기 때문인데, 모든 경우의 수를 예상해서 대응되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그 바탕에는 사회의 추이를 비롯한 흐름 파악에서부터 주변 정보 수집까지 베이직 데이터로 삼을 것이 매우 많고 다양하다.

첫 번째 기사는 선조(宣祖)가 성혼(成渾)을 종묘령(宗廟令)에 제수하고 인견하며 치도(治道)를 물은 적이 있고, 그가 서울에 와 있으면서 양식이 떨어지자 쌀과 콩을 하사했다. 3월에 성혼을 내섬시(內贍寺) 첨정으로 삼았다. 그가 상소하여 당금 정사의 득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였는데 그 상소가 이것이다.

이 상소를 올린 성혼(成渾)은 1535(中宗30)에 태어나서 1598(宣祖31)에 사망한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서인의 영수로 해동십팔현(海東十八賢)의 한 사람으로,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해 절충파의 비조가 되었다. 본관은 창녕.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이며 아버지는 조광조의 문인인 성수침(成守琛)으로 기묘사화 아버지를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1551년(명종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같은 해 생원·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병이 나서 복시에는 응하지 않았고, 백인걸의 문하에 들어가 상서(尙書)등을 배웠다. 20세에 한 살 아래의 율곡 이이와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으며, 1568년(宣祖1)에는 이황을 만나 감화를 받았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 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내섬시 첨정, 1583년 이조참판,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정식 과거(科擧) 급제 출신자가 아니란 이유로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서인의 영수가 되어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곧이어 검찰사에 임명되어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이어 우참찬·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94년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하던 유성룡·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이에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듬해 파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 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됐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廡)됐다.

두 번째 기사는 조헌(趙憲)이 붕당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시정하는 상소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여 임사이구(臨事而懼)하며 호모이성(好謀而成)하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조헌(趙憲)은 1544(中宗39)에 태어나서 1592(宣祖25)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인이며, 조광조(趙光祖)와 이황(李滉)을 사숙했다. 1565년(明宗20) 성균관에 입학하여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부정자, 1571년(宣祖4) 홍주목교수(洪州牧敎授), 1572년 교서관정자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궁중불사(宮中佛寺)의 봉향(封香)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삭직되었고, 이듬해 교서관저작이 되어 다시 같은 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다. 1574년 5월 성절사 박희립(朴希立)을 따라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11월 귀국하여 시무(時務)에 관한 8조소(八條疏)를 올렸다. 1575년 교서관박사에 오르고 이어 호조좌랑, 예조좌랑,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을 거쳤다. 그 뒤 통진현감이 되었으나, 내노(內奴)의 작폐를 다스리다 장살(杖殺)한 죄로 탄핵을 받아 1577년 부평으로 귀양갔다. 1580년 풀려나 이듬해 공조좌랑, 전라도도사에 임명되었고, 1582년 보은현감이 됐다. 1584년 대간의 모함을 받아 파직됐다가 1586년 다시 공주목교수 겸 제독관(公州牧敎授兼提督官)에 임명됐으나, 정여립(鄭汝立)이 나라를 그르치고 있음을 주장한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는 등 5차례에 걸쳐 상소를 올려 받아들여지지 않자 옥천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상소도 이때 올린 상소이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동인의 전횡과 시폐를 지적하다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으나, 그해 11월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1591년 조선에 온 겐소[玄蘇] 등의 일본사신이 조선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자, 일본사신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하고 영·호남의 왜적방비책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격문을 띄우고 의병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과 같이 청주성을 수복했다. 이어 왜적이 충청도와 전라도를 빼앗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산으로 향했으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과의 의견대립과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흩어지고 700여 명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을 이끌고 금산으로 가서 8월 18일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인원과 무기의 열세로 모두 전사했다.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임진4충신으로 불린다. 1734년(英祖10) 영의정에 추증되고, 1883년(高宗20) 문묘에 배향됐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그는 절의와 도학을 겸비한 학자로서, 평생을 강의(强毅)와 직언(直言)으로 일관했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론보다도 실행(實行)과 실공(實功)을 지향했다. 그는 국내외의 형세를 명확히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절실한 대응책을 강구하여 여러 가지 경세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행적은 조선 후기 서인계 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의리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세 번째 기사는 백사 이항복이 이귀(李貴)와 말장난한 것까지 예로 들면서 광해군의 주의를 집중시킨 뒤에 본론인 길례(吉禮)와 흉례(凶禮)를 같이 할 수 없음을 논어의 이 문장을 인용하여 역설하고 있는 장면이다.

네 번째 기사는 영조26년 한창 더위에 홍화문에 나아가 백성들과 신료들을 모아 놓고 균약법(均役法)에 대해서 설명하고 유생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에서 영조가 한 말 중에서 논어의 이 문장들을 인용한 말이다.

양역(良役)이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역역(力役)을 법제적인 구별인 양인·천인의 두 신분층 가운데서 양인에게 부담시킨 일종의 신역(身役)인데, 처음에는 직접 역역을 징발하였으나 점차 베옷[布] 또는 곡식으로 대신하게 되어 조선 후기에는 국가 재정수입의 큰 몫을 차지하는 부세(賦稅)의 형태가 되었다.

이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1750년(영조26) 7월 영조는 전격적으로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내용의 감필을 단행하면서 부족분을 여하히 보충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균역절목청(均役節目廳)을 설치하여 감필에 따라 줄어든 만큼의 비용을 해당 관청에 보충하는 급대책(給代策)을 강구하게 된다.

이 양역이 제도 자체의 모순과 운영상의 결함 등으로 민폐를 야기함은 물론 사회의 동요까지 초래하게 되자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란 대책이 논의되어 왔다. 이 기사도 그 논의의 일환으로 마침내 1750년(英祖26) 양역의 부담을 대폭 줄여서 포 1필로 균일화함과 동시에 그에 따른 재정 결손의 보완책 마련에 착수하였다. 1년여의 논의 끝에 1752년(英祖28) 어염세(魚鹽稅)·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은여결세(隱餘結稅)·결전(結錢) 등의 새로운 세금을 통해 보충하도록 하는 내용의 균역법으로 시행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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