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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저런이야기 > 백천 조선왕조 베스트셀러 <논어>
재계하는 자는 음악도 듣지 않고 조문도 하지 않는다제94화(話) 신제전질(愼齊戰疾)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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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4.29  09: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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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종 18년(1487 丁未 / 明 성화(成化) 23년) 7월 19일(丙辰)

대사헌 김승경 등이 강무 장소를 강원도로 할 것을 아뢰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승경(金升卿) 등이 와서 아뢰기를 <전략>

“지금 하교에 이르시기를, ‘수요·장단은 하늘에 있다.’라고 하셨으니, 신 등이 말하고 싶은 것은, 전(傳)에 이르기를, ‘공자가 삼가는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다.’라고 하였는데, 인주(人主)는 한 몸으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중임을 받드는 것이니, 질병을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이 도를 지나간 일이 있는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해소병을 앓고 있었으며, 강음(江陰)이 더 심했습니다. 만약 신의 말이 믿어지지 않으시면, 이 도(道)의 재상(宰相)을 지낸 자들에게 물으시면 아실 것입니다.”

하였으나, 들어주지 아니하고, 이어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전교하기를,

“황해도에서 강무하는 일을 헌부(憲府)에서 간절히 말하나, 종묘에 짐승을 올리는 것과 양전에 진상(進上)하는 예(禮)는 폐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옛부터 사냥하는 예가 있었기 때문에 들어주지 아니하였으니, 경(卿)들도 이 뜻을 다 알아라.” 하였다.

“今敎云壽夭長短在天, 臣等以爲傳曰: ‘子之所愼, 齋、戰、疾.’ 人主一身, 奉宗廟社稷之重, 其可不愼疾乎?

2)선조 35(1602)년 4월 7일 戊戌

홍문관이 변례에 대한 근거 삼을 전례를 찾아 아뢰다.

<전략> 그리고 ‘재계하는 자는 음악도 듣지 않고 조문도 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재계를 하면서 음악을 들으면 올바름을 잃어 그 생각이 흩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음악을 듣는 것도 그러한데 더구나 흉하고 더러운 일을 듣는 것이겠습니까? 논어(論語)에 ‘공자가 삼가는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다.’ 하였는데, 그 중에 ‘재계라는 말은 정리한다는 뜻이니 제사를 지내려 할 때 그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정리하여 신명(神明)과 교접하려 함이다.’ 하였습니다. 이번의 재계하는 때를 당하여 마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생각이 혹 정리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신들이 상고한 것은 이 정도에 불과한데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且論語, 子之所愼, 齋戰疾註 ‘齋之爲言, 齋也.

3)광해군일기 11(1619)년 8월 16일 丙寅

왕이 모화관에서 차관을 위한 전별연을 열다.

왕이 모화관에서 두 차관을 위한 전별연을 열었다. 원 차관이 말하기를

<전략> “논어에서 ‘부자께서 조심한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 하였습니다. 전쟁이란 죽음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공자도 이것을 조심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 신중해야 한다고 하교하고 또 둔전과 양병의 이해에 대하여 말씀하시니, 일에 임하여 치밀하게 하는 뜻이 참으로 깊고 크다고 할 만합니다. 전날 두송(杜松)이 좋은 계략을 쓰지 못하여 10만의 군사를 적의 소굴에서 다 잃게 하였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는 많은 군사가 계속 나오고 있고 앞으로 귀국의 화수들과 협력하여 무찌른다면, 태산으로 새알을 누르는 것과 같을 텐데, 어찌 적을 가볍게 보고서 망령되게 행동할 리가 있겠습니까?”

差官曰: "子之所愼, ‘齋、戰、疾.’ 兵者, 死地也, 故戰者, 夫子之所愼.

4)숙종 10(1684년 淸강희(康熙) 23년)년 12월 6일 丁酉

봉조하 송시열을 인견하다.

봉조하 송시열(宋時烈)이 능하(陵下)로부터 조정에 들어와서 문안하니, 임금이 와내(臥內)에서 인견(引見)하였다. 송시열이 말하기를,

“세월이 물처럼 흘러서 성모(聖母)의 초기(初朞)가 문득 지나가니, 효사(孝思)의 망극하심이 거듭 새로우실 것으로 생각됩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미류(彌留: 병이 낫지 않고 오래됨.)하여 대제(大祭)도 친히 행하지 못하였으니, 추모(追慕)하는 마음의 망극함을 더욱 무엇이라 말하겠는가?”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공자(孔子)의 삼가한 바는 재계와 전쟁과 질병인데, 지금 이 섭행(攝行)이 질병을 삼가하시는 도리에 어찌 마땅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바야흐로 조섭(調攝)하는 중에 있으므로, 설복(褻服)으로 유현(儒賢)을 접견하니, 지극히 미안하다. 만약 소회(所懷)가 있으면 모두 말하는 것이 좋겠다.”

時烈曰: "孔子所愼齋, 戰疾, 今此攝行, 豈不宜於愼疾之道乎?

5)영조 19(1743년 淸건륭(乾隆) 8년)년 2월 19일 癸卯

오광운이 황단에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자께서 조심하신 바는 오로지 제계(齊戒)와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겸하여 조심할 수 없을 경우 제사는 대행할 수 있지만, 질병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제(齊)나라에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구(伯舅: 옛날에 천자(天子)가 성(姓)이 다른 제후(諸侯)에 대하여 일컫던 말.)는 늙었다 하여 뜰아래에 내려가 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천자가 제후(齊侯)의 늙음을 딱하게 여김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의 존주(尊周)하는 정성으로 보건대, 저 하늘이 성궁(聖躬)을 돌보심이 어찌 주나라 왕보다 아래로 가겠습니까? 바야흐로 성후(聖候)를 조용히 조섭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황단(黃壇)에 친히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이미 유시하였다. 대행시킬 수 없다.”

하였다.

孔聖所愼, 惟齊與疾.

6)영조 19(1743년 淸건륭(乾隆) 8년)년 8월 4일 甲寅

치재일의 규례를 무시하는 등의 잘못을 한 승지들을 추고하게 하다.

하교하기를,

“공자(孔子)가 삼간 바는 곧 재계(齋戒)이었으니, 3일을 치재(致齋)함은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도리이다. 그런데 정원에서는 재일(齋日)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 한만한 장주(章奏)를 보통 전례에 따라 받아들이고 거짓 알지 못하는 체하였으니, 정원에 있는 여러 승지를 모두 중추(重推)하도록 하라.” 하였다.

子之所愼, 卽齋也.

7)영조 24(1748년 淸건륭(乾隆) 13년)년 7월 5일 丁亥

좌의정 조현명이 차자를 진달하여 죄줄 것을 청했으나 그 차자를 땅에다 팽개치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죄줄 것을 청했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공자(孔子)가 삼간 것은 재계(齋戒)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 옹주의 집에 거둥하신 것이 마침 추향(秋享)의 청재(淸齋) 때를 당하였는데, 신이 엊그제의 진연(診筵)에서 일이 있기에 앞서 진계(陳戒)하지 못한 탓으로 드디어 임금으로 하여금 더없이 큰 잘못된 거조가 있게 하였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바라건대, 사패(司敗: 사법당국)에 내려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 형벌로 감단(勘斷)하소서.” 하니, 임금이 차자를 열람하고 땅에다 팽개치며 말하기를,

“이 차자는 좌상의 문집(文集)에 있으면 빛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어제(御製)를 수집하였는데, 이제 좌상의 일을 보고 나니 그것을 모두 불태우고 싶다.” 하였다. 조현명이 훌륭함을 뽐내고 이름 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다.

傳云, ‘子之所愼, 齋也.

8)영조 39(1763년 淸건륭(乾隆) 28년)년 8월 5일 己丑

군감을 보다.

임금이 군감(君鑑)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공성(孔聖)이 조심한 것은 재계(齋戒)이다. 황조(皇朝) 홍무(洪武: 明 太祖의 年號) 때에도 또한 백집사(百執事)들에게 계칙하기를,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은 오직 성(誠)과 경(敬)뿐인 것이다.’ 하였다. 내가 비록 성의는 부족하지만 사전(祀典)에 감히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 나의 뭇 신하들은 모든 사전(祀典)에 대해 항상 이 훈계를 외우도록 하라.” 하였다.

孔聖所愼者齊也.

9)영조 44(1768년 淸건륭(乾隆) 33년)년 1월 23일 壬子

지사 정형복이 수령의 전최·재용의 절약·세금의 징수 등에 대해 상소하다.

지사 정형복(鄭亨復)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우리 전하께서는 새해 첫 달에 재상들에게 큰 유시를 내려 말을 하게 유도하셨는데, 이는 실로 밝은 운수를 만회하여 태평의 시대를 여는 하나의 큰 계기입니다. 이에 감히 쇠잔한 정신을 집중시켜 외람되게 망령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공자께서 ‘오직 병이 날까 조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요양을 너무나 소홀히 하시고 빈번하게 거둥하여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수응(酬應)을 많이 하고 계시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너나없이 애태우고 있습니다. <중략>창고가 부실하여 3년 먹을 곡물이 저축되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자물쇠를 신중히 취급하지 않아 빈 문서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으니,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하며 명실(名實)을 엄히 따져야 할 것 입니다. 그런데 서울과 지방의 요판(料辦)하는 폐단이 백성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고 있으니, 금령(禁令)을 더욱 엄히 해야 됩니다. <하략>

財用宜節. 孔聖之訓, 惟疾是愼.

10)순조 1(1801년 淸 가경(嘉慶) 6년)년 12월 10일 壬子

임금의 안후가 평복되어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고, 반교문을 내리다.

임금의 안후(安候)가 평복되었다 하여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다.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황궁(皇穹 : 上天)의 말없는 도움을 받아 빨리 천화(天和: 사람 몸의 원기(元氣).)를 회복하였고, 대정(大庭)에 성대한 예식을 베풀어 길이 큰 복록(福祿)을 맞이하였다. 이에 10행의 고명(誥命)을 널리 반포하여 팔방(八方)의 여정(輿情)에 답하노라. 묘연(妙然)한 충인(沖人)이 끝없이 큰 역수(曆數)를 이었는데, 나에게 철명(哲命)을 끼침이 사복(嗣服)의 처음에 있었다. 비록 3년 동안 갱장(羹墻: 앙모(仰慕)의 뜻. 요(堯)임금이 죽자 순(舜)임금이 3년 동안 앙모하여 담장[墻]에서도 요임금을 보고 국[羹]그릇에서도 요임금을 보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의 생각이 간절하여 부르짖었으나 미칠 수 없고, 돌아보건대 한결같은 생각으로 조심하라는 경계를 잠시도 잊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역경(易經)의 무망(无妄)의 근심을 이루었으나 공자(孔子)의 ‘질병에 삼가라.’는 훈계를 소홀히 했음은 아니었다. 여러 영령(英靈)이 가호(珂護)하시어 서경(書經)의 홍범구주(洪範九疇) 중 오복(五福)의 하나인 강녕(康寧)의 상서로움을 점칠 수 있고, 육기(六氣: 한(寒)·서(暑)·조(燥)·습(濕)·풍(風)·우(雨).)가 순조롭게 옮겨져 마마의 헌데 자국[痘痕]이 적은 길조(吉兆)라고 일컬었다.”

非忽夫子愼疾之訓.

11)순조 12(1812년 淸 가경(嘉慶) 17년)년 10월 8일 丁未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고 자후의 팔순을 축하하는 사면령을 반포하다.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았는데, 반교문(頒敎文)은 다음과 같다.

“말하노라. 자후(慈候)가 불편하신 기색이 있어 열흘이 되도록 애태우고 있었는데, 넓은 하늘이 끝없는 복을 내려 주시어 이튿날 바로 회복되셨다. 이에 그 정성을 선포하여 함께 경하(慶賀)하고자 하는 뜻을 보이는 바이다. 생각건대 자위(慈闈)께서 팔순(八旬)의 고령에 오르시어 나 소자(小子)는 만수(萬壽)하시라는 축원이 간절하였었다. 온 나라에서 힘을 기울여 봉양한 것은 옛 선왕의 효성스러운 마음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며, 삼조(三朝: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일.)의 예를 부지런히 거행해 만년에 지극한 기쁨을 받들게 되었다. 드나들며 보살펴 주신 은덕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갚고자 한다면, 오직 좌우에서 봉양하는 방도를 잠시인들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찌하여 공자(孔子)께서 〈병을〉 조심하신 절차가 곧 기주(箕疇: 홍범구주)의 〈오복(五福) 중에〉 강녕(康寧)이란 데 있었겠는가? 저 산이나 언덕처럼 큰 복을 타고 나셨으니 진실로 모든 신령(神靈)이 호위해준 줄을 알겠고, 올해 이 달에 감회(感懷)를 더하는데 잠시 육기(六氣: 한(寒)·서(暑)·조(燥)·습(濕)·풍(風)·우(雨).)의 조섭에 어긋났던 것이다. 열흘 동안 뜰에서 문후한 것은 걸음을 똑바로 걷지 못하셨던 것이고, 하루 종일 약원에서 수직하는 것은 맛보는 것을 반드시 시탕(侍湯)에 먼저 하였다. 바야흐로 모든 사람들이 초조해 하고 근심하던 중, 다행히 병환이 회복되는 경사가 있게 되었다. 비방의 치료에서 효과를 본 것은 감히 하늘이 지성에 감동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자위께서 더욱 강녕해지셨으니 만수하시라는 축원이 더더욱 드높음을 볼 수 있다. 대궐에서는 기쁜 기운이 한창 넘치고, 온 누리에는 환호성이 오르고 있다. 경사스런 해에 공경히 교산(喬山)을 보니 매양 성조(聖祖)께서 돌보아 주신 덕이 감격스럽고, 길(吉)한 날에 진전에 절하고 나니 황고(皇考: 先考)께서 기뻐하고 편안해 하시는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다. 종묘에 제사하여 이런 사유를 경건히 아뢰고, 온 조정의 하례를 받아 너희 백성들에게도 다 함께 유시(諭示)하는 바이다. 은혜를 미루어 나가고 혜택을 베풀어 자위의 은혜로운 마음을 넓혀 나갈 것이며, 내 어버이를 통해 사랑을 펴는 것도 효도의 정치를 돈독히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이달 초8일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아! 올해는 온갖 길상(吉祥)이 모여들어 영원히 전대의 경사에 부합되었으니, 우리나라가 만세토록 태평할 것이 오늘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하였다.<예문관 제학 김계락이 지었다.>

夫何孔聖所愼之節.

12)순조 15(1815년 淸 가경(嘉慶) 20년)년 1월 16일 壬寅

인정전에서 진하를 행하고 교문을 반포하다.

인정전에서 진하(陳賀)를 행하였는데, 권정례로 하였다. 교문을 반포하였는데, 이르기를,

“말하노라. 과인이 병이 있어 몇 달이 넘도록 앓는 우환을 만났었는데, 하늘이 도우셔서 곧 건강이 회복되는 기쁨을 아뢰게 되었다. 이에 떳떳한 법도를 따라, 여망(輿望)에 응하고자 하노라. 아! 부족한 내가 10년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밤낮 한 결 같이 두려운 마음을 가졌었다. 조심하였노라. 부여받은 책임이 막중함은 오직 천지(天地)와 조종(祖宗)께서 맡기신 때문이고, 언제나 오르내리시는 영령(英靈)께서 굽어 살피시는 듯 하여 한 동작 한 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무릇 지금 할 일이 수없이 많으니 몸과 마음을 아껴 보전함만 같음이 없고, 돌아보건대 보잘것없는 내가 외람되이 이 막중한 기업(基業)을 맡았노라. 질병을 조심하란 공자(孔子)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건만, 어쩌다가 주역(周易)에 이른바 예기치 않았던 우환이 있게 되었다. 온갖 신령이 돌보아 주어 몹쓸 병마(病魔)가 느닷없이 침범할 이가 없었으련만, 육기(六氣)가 서로 감염하여 영양(榮養)의 조섭(調攝)을 적절히 하지 못했노라. <하략>”

非忽孔聖憤疾之義, 偶致大易無妄之憂.

이 말은 술이(述而)편 12장의 말로

子之所愼은 齊(齋)戰疾이러시다.

(공자께서 조심하신 것(삼가 하신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셨다.)

이 문장에 주자(朱子)가 주해(註解)하기를 제(齊)란 말은 가지런히 한다는 뜻이니, 장차 제사지내려 하면서 가지런히 하지 못한 사려(思慮)를 가지런하게 하여 신명(神明)과 교접(交接)하는 것이니, 정성이 지극하고 지극하지 못함과 귀신(鬼神)이 흠향하고 흠향하지 않음이 다 여기에서 판가름 난다. 전쟁(戰爭)은 여러 사람의 생사(生死)와 국가(國家)의 존망(存亡)이 달려있고, 질병(疾病)은 또 내 몸이 사느냐 죽느냐 보존되느냐 없어지느냐가 달여 있는 것이니, 모두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

윤돈(尹焞)이 말하길 공자께서는 조심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으니, 이는 제자(弟子)가 그 큰 것만을 기록했을 뿐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예기(禮記)의 제통(祭統)에는 제사 때가 되어 장차 제사를 지내려고 할 적에 군자(君子)가 마침내 재계(齋戒)를 한다. 재계라는 말은 가지런히 하다는 뜻이니, 가지런하지 않은 것을 가지런히 하여 공경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 문장에서는 이 말을 인용하여 강조한 것이다.

공자님 같은 분은 매사를 삼가고 조심하셨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삼가신 것이 바로 재계(齋戒)하심과 전쟁(戰爭)과 질병(疾病)이란 말인데, 재계(齋戒)함은 제사지내기에 앞서 내 자신을 신명(神明)이나 하느님에게 그대로 드러내게 됨이니, 더욱 삼가게 되고 조심하게 되는 것이고, 전쟁과 질병은 인간의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이니, 하늘로부터 타고 난 생명을 제대로 보존하기 위해서 삼가고 조심해야 된다는 의미이다.

모든 생명은 그만큼 귀하고 중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겠다. 내 생명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하늘로부터 부여 받은 것이니, 이를 온전히 지키고, 온전한 인간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도 잘 보존해야만 할 의무가 인간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도 자살을 가장 못된 것으로 본다. 자기의 목숨을 제 스스로 끊는다는 것은 이런 하늘의 명을 직접 거스르는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하늘로부터 천명(天命)을 받은 존재라서 우주 대령(大靈)인 절대자의 정신과 의지를 인간들이 오롯이 이어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비록 몸은 각각 나눠져 있더라도 정신과 마음은 모두 같은 하늘의 것을 받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공자님이 역설하신 인(仁) 사상이다.

이 문장에서와 같이 공자님께서 특별히 삼가신 바는 나의 마음을 신명(神明)에게 교접(交接)하기 위해 가지런히 드러내는 재계(齋戒)와 그 마음을 온전히 담아 낼 수 있도록 몸의 상함을 보전하기 위한 전쟁과 질병을 삼가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계하는 자는 음악도 듣지 않고 조문도 하지 않는다. 고 했는데, 재계를 하면서 음악을 들으면 올바름을 잃어 그 생각이 흩어지기 때문이며, 조문을 하면 슬픈 마음으로 인해 평정된 마음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조심하고 삼간다는 말은 평소에도 모든 일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조심하고 삼가신 것이 바로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는 말이다.

첫 번째 기사는 대사헌이 황해도(黃海道)에서 실시하던 강무(講武) 장소를 강원도로 옮기자는 것인데, 황해도는 해소 전염병이 도는 곳이니 막중한 임무를 가진 임금의 건강이 걱정되어서 바꾸자고 했지만 성종은 그냥 종전대로 시행하도록 한다.

두 번째 기사는 선조 35(1602)년 4월 홍문관(弘文館)이 변례(變例)에 대한 근거 삼을 전례를 찾아 아뢰는 말 중에서 논어(論語)에 ‘공자가 삼가는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다.’ 하였는데, 그 중에 ‘재계라는 말은 정리한다는 뜻이니 제사를 지내려 할 때 그 정리되지 못한 생각을 정리하여 신명(神明)과 교접하려 함이다.’라고 했으니, 이번의 재계(齋戒)하는 때를 당하여 마침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이로 인하여 생각이 혹 정리되지 못할까 염려되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논의하여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까 선조(宣祖)는 윤허한다고 전교했다.

세 번째 기사에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보면 후금(後金)인 청(淸)이 명나라 변경을 침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자, 명나라는 청(淸)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해왔다. 조정에서는 청(淸)을 의식하면서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원병을 보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출병을 결정했다. 1618년 3월 1일 강홍립을 오도원수(五道元帥)로 부원수인 김경서(金景瑞)와 함께 1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출병했다. 1619년 명나라 제독(提督) 유정(劉綎)의 군과 관전(寬甸) 방면에서 합류해 동가강(佟佳江)을 따라 회인(懷仁)에서 노성(老城)으로 향했다. 이들 조(朝)·명(明) 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해 앞뒤에서 적을 협격(挾擊)하기로 했지만 작전에 차질이 생겨 부차(富車)에서 대패했다. 포수 3,500명, 사수6,500으로 구성된 조선군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여, 선천군수 김응하와 운산군수 이계종 등이 전사했다. 장거리 행군과 이틀이나 굶다시피 한 조선군이었기에 하루 밤사이에 수 천 명을 잃었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지만 명(明)나라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입장이라서 조선의 파병군은 싸움도 제대로 못하고 힘없이 당해야만 했다. 이때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병이 부득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청군(淸軍)에 투항했다. 이는 출정 전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고 한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것이었다. 강홍립 장군은 광해군의 밀지(密旨)에 따라 청나라에 투항하여 조선군의 목숨을 하나라도 더 구할 것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일 째 되는 날, 나머지 3,000명을 데리고 투항했다. 그 뒤 1620년, 청국군에 억류됐던 조선 군인들은 강홍립의 외교에 따라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 왔다. 하지만 그 자신과 부원수 김경서 등 10여명의 장군 급들은 계속 남아 인질이 되어 있다가 1627년(仁祖5) 정묘호란 때 청국군의 선도로서 입국해 강화(江華)에서의 화의를 주선한 뒤 국내에 머물게 된다.

이 기사는 광해군이 모화관(慕華館)에서 중국 사신(使臣)이 원현룡(元見龍)이 명(明)의 요청으로 파병됐다가 전사한 장병들과 청(淸)에 포로로 잡힌 강홍립 등 장수들을 포상, 위무하는 뜻에서 은(銀)1만 냥을 보내오자 이들을 송별하는 자리에서 중국 사신이 광해군에게 한 말이다.

이 원현룡(元見龍)이 온 진짜 목적은 추가 병력의 지원 요청 때문이었다. 즉 화수(火手) 2~3천명을 추가 파병(派兵)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그동안 양성해 놓은 포수(砲手) 수 천 명이 적진에 포로로 있는데, 다시 추가 파병(派兵)을 요구하니, 조정에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가급적 신중론을 펴서 병력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음을 말하자 명나라 사신이 이런 대꾸를 한 것이다.

이 당시 명(明)나라 조정은 부패하고, 관리들의 기강이 서지 않고, 임진왜란 때 조선(朝鮮)에 파병하느라 국방력은 매우 취약해 국운이 기울어 가는 상황에서 신흥 청(淸)과 광해군은 두 줄타기 외교 전략을 잘 구사해서 임진왜란 때 파병한 공을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파병(派兵)을 했지만 그 지휘관인 강홍립에게는 싸우는 척만 하고, 투항하여 병력 손실을 최소화 하라는 밀명을 내려서 이들이 청군(淸軍)에 포로로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이 이런 밀지(密旨)를 내린 이유는 그 싸움이 우리의 싸움이 아니고, 의리상 할 수 없이 내보내는 파병(派兵)이며, 그 때에 요동과 만주 벌판을 달리며 훈련을 한 청군(淸軍)은 강성했고, 실지로 그간의 전투에서 명군(明軍)이 여러 차례 대패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훈련이 안된 우리의 군사들을 그 죽음의 벌판으로 내보내야 하는 임금의 그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린다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의 요청으로 월남전에 파병하면서 느꼈던 심정과 꼭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리 외교의 노력이 나중에 반정군들에게 명나라를 섬기지 않는 빌미를 제공하여 폐위 교서에는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며 옥죄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했다.

네 번째 기사는 숙종10년에 병이 나서 평복을 입고 누워 있다가 원로 대신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면대(面對)하면서 둘이 나눈 대화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우암과 숙종은 나이 차가 55살로 이때는 24살의 한창 나이의 임금과 78세의 노신하(老臣下)와의 만남이라서 먼저 숙종(肅宗)이 평상복으로 누워서 연로한 신하를 만나기가 미안해서였는지 예(禮)를 차리려다 그만 두고 말로써 그 미안함을 대신 사과 하면서 소회를 말하라고 한 것이다.

우암(尤庵)이 보기에는 손자 뻘인 한창 나이의 임금이 병석에 누워서 자신의 어머니 소상(小祥)에도 참사(參祀)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심경이 착잡하여,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옥체 보존을 위해서 삼갈 것을 말하는 장면이다.

숙종은 이 당시 천연두를 앓고 있는 중이었다. 기록에 보면 1683년 10월, 숙종이 두질(豆疾: 두창, 마마, 천연두)을 앓았다. 숙종의 모후 왕대비(王大妃) 김씨(金氏: 명성왕후)는 중전 민씨(閔氏: 인현왕후)와 함께 숙종(肅宗)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무당의 권고대로 절식을 하고 매일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리다가 감질(感疾: 감기)에 걸렸는데 숙종이 와병 중이라 쉬쉬하며 치유치 않다가 점점 위중해졌고, 숙종이 온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12월 5일에 열병으로 사망하여 이 당시에는 소상(小祥)을 지난 뒤였다.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명성왕후 김씨는 전속 무당을 두었을 만큼 무속을 신봉했고, 숙종도 무속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편이었다. (숙종실록 15권, 10년(1684 갑자 / 청 강희(康熙) 23년) 2월 21일 丁巳)고 기록되어 있다.

요즘에야 천연두는 종두법(種痘法)이 나와서 별 문제가 안 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두창(痘瘡)이라면 무서운 중병 중의 하나였다. 병이 나아도 흉터인 곰보 자국이 깊게 남을 정도로 고열과 발진 종기로 사망에 까지 이르곤 했는데, 옛날의 영아(嬰兒) 사망률이 높은 것도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이 천연두의 영향도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우암(尤庵)이 오랜만에 도성(都城)으로 들어 와서 임금에게 문안을 드리겠다고 전하니 숙종이 불러서 만나는 인견(引見)을 했다고 했다. 그런 위중한 질병을 않고 있는 숙종(肅宗)이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인 노대신(老大臣)을 만난 자리도 정청(政廳)이 아닌 와소(臥所)라고 하여 누워 자거나 쉬는 곳을 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이 안 되도록 일종의 격리 조치를 하고 있는 침전(寢殿)이었다는 말이다.

다섯 번째 기사는 영조19년에 예조 참판 오광운(吳光運)의 상소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황단(黃壇)에 친히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함이 마땅하다. 고 했는데, 영조는 “진달한 바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이미 유시했다. 대행시킬 수 없다.”고 비답했다.

여섯 번째 기사는 치재일(致祭日)의 규례(規例)를 무시하는 등의 잘못을 한 승지들을 추고하라고 하교(下敎)하기를, “공자(孔子)가 삼간 바는 곧 재계(齋戒)였으니, 3일을 치재(致齋)함은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도리이다. 그런데 정원(承政院)에서는 재일(齋日)의 규례를 따르지 않고 한만한 장주(章奏)를 보통 전례에 따라 받아들이고 거짓 알지 못하는 체했으니, 정원(政院)에 있는 여러 승지(承旨)를 모두 중추(重推)하도록 하라.”고 한 기사이다.

일곱 번째 기사는 영조24년에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차자(箚子)를 진달하여 죄줄 것을 청하는 말 중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추향(秋享)의 청재(淸齋) 때 영조가 옹주의 집에 거둥한 것을 막지 못하여 임금으로 하여금 더없이 큰 잘못된 거조가 있게 하였으니, 죽어도 죄가 남습니다. 고 하자 영조는 이 차자를 땅바닥에 내 팽개치면서 “이 차자는 좌상의 문집(文集)에 있으면 빛남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사관(史官)은 영조가 이토록 역정을 낸 것은 바로 조현명이 훌륭함을 뽐내고 이름 내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적어 놓고 있다.

여덟 번째 기사는 영조39년에 영조가 군감(君鑑)을 보고서 하교하기를,

“공성(孔聖)이 조심한 것은 재계(齋戒)이다. 황조(皇朝) 홍무(洪武: 明 太祖의 年號) 때에도 또한 백집사(百執事)들에게 계칙하기를,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것은 오직 성(誠)과 경(敬)뿐인 것이다.’ 라고 했다. 내가 비록 성의는 부족하지만 사전(祀典)에 감히 소홀히 한 적이 없었으니, 나의 뭇 신하들은 모든 사전(祀典)에 대해 항상 이 훈계를 외우도록 하라.” 고 한 기사이다.

아홉 번째 기사는 지사 정형복(鄭亨復)이 수령의 전최·재용의 절약·세금의 징수 등에 대해 상소한 말 중에서 “공자께서 ‘오직 병이 날까 조심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요양을 너무나 소홀히 하시고 빈번하게 거둥하여 바람과 추위를 피하지 않으며 수응(酬應)을 많이 하고 계시므로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너나없이 애태우고 있습니다.”고 늙은 영조가 정무에 몰두하는 모습에 건강에 유의하라고 한 기사이다.

열 번째 기사는 순조1년 12월 11살의 어린 임금인 순조(純祖)가 마마에 걸려 고생을 하다가 회복되어 인정전(仁政殿)에서 진하(陳賀)를 행하면서 반포한 반교문(頒敎文)에 이르기를,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여 ‘질병에 삼가라.’는 훈계를 소홀히 했음이 아니라 천연두는 사람이면 한 번 씩 다 겪는 통과의례적인 질병인데 영령(英靈)이 가호(珂護)로 다행히 곰보 자국[痘痕]이 적게 평복된 것을 경하한다는 것이다.

11 번째 기사는 순조 12년 10월 인정전에서 하례를 받고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팔순을 축하하는 사면령을 반포하는 교서에서 논어의 이 말을 인용하여 8순 자후(慈候)의 강녕을 빌고 성효의 차원에서 이달 초8일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雜犯)으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고 한 반교문(頒敎文)이다. 이 때는 홍경래(洪景來) 난도 진압되어 온갖 길상(吉祥)이 모여들어 영원히 전대의 경사에 부합되었으니, 우리나라가 만세토록 태평할 것이 오늘부터 시작된 것이라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린 것이다.

이런 극진한 공양 덕으로 혜경궁 홍씨는 4년을 더 살아 82살까지 장수를 했다.

12 번째 기사는 순조 15년 1월 인정전에서 진하(陳賀)를 행하고 교문을 반포했는데, 그 교문(敎文) 중에 질병을 조심하란 공자(孔子)의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건만, 어쩌다가 주역(周易)에 이른바 예기치 않았던 우환이 있게 되었다면서 육기(六氣)가 서로 감염하여 영양(榮養)의 조섭(調攝)을 적절히 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기력을 되찾았으니 이를 자축한다는 것이다.

순조(純祖)의 치세(治世)를 약술하자면 정조가 갑자기 죽자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여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인 김귀주(金龜柱)의 동생으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았다. 정조가 고수했던 탕평의 원칙은 사라졌고, 정조와 시파(時派)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장용영은 혁파되었다.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는 정적(政敵)인 시파, 그중에서도 남인 시파에 대해 천주교를 문제 삼아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순조는 1802년(純祖2) 10월에 안동김씨 김조순(金祖淳)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정조가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기 위해 재간택까지 해 놓은 상태였지만, 김조순이 시파였기 때문에 노론 벽파들은 김조순의 딸을 순조비로 삼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정조가 정해 놓은 일을 쉽게 저버리지 못해 이후 3대에 걸친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순원왕후는 효명세자(익종(翼宗)으로 추존)와 3명의 공주를 낳았으며, 24대 헌종(憲宗)은 효명세자의 아들로, 순조의 손자이다. 1803년(純祖3) 12월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경주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노론 벽파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14세가 된 순조가 친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순조의 정치력은 여전히 미약했다. 이러한 가운데 정권을 잡은 것은 외척인 김조순의 집안이었다. 시파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는 비변사를 장악해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벽파의 몰락과 시파의 집권은 사실상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순조의 외척인 안동김씨는 또 다른 외척인 반남박씨 세력과 풍양조씨 세력의 협력을 얻어 권력을 장악했다. 안동김씨는 충절과 학문을 숭상해 온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의 집안으로, 대대로 명문가로 명성을 이어 왔다.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김좌근(金左根), 김문근(金汶根), 김병기(金炳冀)로 이어졌다. 그들은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권력을 행사했다.

홍경래난이 일어났을 때 순조는 병중(病中)에 있었고, 김조순과 박종경이 함께 의논해 정사를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박종경은 훈련대장으로 홍경래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호조판서에 올랐으나 조득영이 반남박씨의 부정부패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부터 안동김씨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하지만 순조는 안동김씨 세도에 점차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1827년(순조 27)에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세자의 처가인 풍양조씨 가문을 안동김씨 가문의 견제 세력으로 키우고자 했다.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명세자는 1819년(순조19)에 풍양조씨 조만영(趙萬永)의 딸과 혼인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하며 집권한 효명세자는 안동김씨 세력의 반대파였던 소위 효명(孝明) 4간신(奸臣)이라는 자기 세력을 요직에 등용해서 권력의 핵심 기구인 비변사를 장악했다. 그러나 1830년(순조30)에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노력했던 효명세자가 죽으면서 안동김씨가 다시 득세하게 됐다. 한편 효명세자의 죽음으로 위축되었던 풍양조씨 세력은 1832년(순조32)에 순조가 조만영의 동생 조인영(趙寅永)에게 세손(훗날의 헌종)의 보도(輔導)를 맡김으로써 다시 한 번 회생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인영을 중심으로 한 풍양조씨 가문은 헌종의 즉위와 함께 세도정치를 펼치게 되어 조(趙)대비를 통해서 고종도 옹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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