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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아니한다.제96화(話) 구인이득인(求仁而得仁)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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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9  09: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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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話) 구인이득인(求仁而得仁)

1)성종 23년(1492 壬子 / 明 홍치(弘治) 5년) 12월 4일(庚子)

이목 등 8명이 윤필상의 죄를 논하자 그들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다.

이목(李穆) 등이 서계(書啓)하기를, <전략>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수상(首相)이겠습니까? 신이 존경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윤필상(尹弼商)은 욕심이 많고 마음이 흐려 재물(財物)을 늘리므로 논박(論駁)을 당한 적이 한 번이 아닌데, 하물며 이제 뜻을 맞추려고 힘을 쓰고 아첨하여 기쁘게 하며 성상을 불의(不義)로 인도하므로 이를 간사하다고 이르는 것이고, 그 은총(恩寵)을 굳게 하려고 하여 자지(慈旨)에 억지로 따르니 이를 교묘[巧]하다고 이르는 것이며, 행하는 바가 이와 같은데도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니 이를 귀신이라고 이르는 것입니다. 그 의논한 바가 사도(斯道)에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신 등은 말이 여기에 이르렀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조정의 신하에게 하문(下問)하시어 신 등의 말과 같지 아니함이 있으면 신 등은 마땅히 면전(面前)에서 속인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는데,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그 나라에 살면서 그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수상이겠는가? 또 뜻을 맞추려고 힘을 쓰고 아첨하여 기쁘게 하며 자지(慈旨)에 억지로 따른다는 것으로써 간교하다고 한다면, 이극배(李克培)와 노사신(盧思愼)도 이 의논에 참여하였는데 어찌하여 홀로 윤필상만 지적하는가? 또 이것이 어찌 간교함이 되겠는가? 행동하는 바가 이와 같으면서도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을 귀신이라고 이른다면 이극배·노사신도 역시 귀신인가? 이는 반드시 듣고 본 바가 있어서 그것을 말할 것이며, 아니면 몰래 부추긴 자가 있을 것이다. 대간(臺諫)이 대비(大妃)의 전교를 보고 이르기를, ‘대비가 대신을 능욕(凌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제 유생(儒生)이 도리어 대신을 능욕하니, 이는 대신이 도리어 유생 밑에 있는 것이다. 이목(李穆) 등을 의금부(義禁府)에 내리도록 하라.”

하였다. 이목(李穆)과 심순문(沈順門)·최광윤(崔光潤)·조원기(趙元紀)·남곤(南袞)·송여려(宋汝礪)·이수함(李守諴)·이윤탁(李允濯) 등이 갇히었다.

孔子曰: “居是邦, 不非其大夫.” 況首相乎? 臣非不知尊敬也,

2)광해군 9(1617)년 11월 24일 乙酉

의정부에 보낸 폐비 문제의 완곡한 처리를 청하는 좌의정 정인홍의 의견

좌의정 정인홍이 의정부에 의견을 보내기를, <전략>

그러나 나쁜 자들도 포용해 주는 것이 임금이 가져야 하는 큰 도량인 것입니다. 군신(君臣)과 모자(母子)의 명분과 의리는 천성에서 나와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왕(寧王)같은 성인과 태공(太公)같은 현인이 3천 8백 명의 대중과 함께 잔적(殘賊)으로써 일개인이 되어버린 은나라 주(紂)를 주벌하는 때에 백이와 숙제만이 유독 나서서 말을 멈추어 세우고 간하면서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것은 단지 이 명분과 의리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그를 칭송하여 ‘인(仁)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성명께서 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 있어서 신하들과 같지 않은 점도 여기에 있으며, 논의하는 사람들이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면서 간쟁하는 것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략>

宣聖稱其‘求仁而得仁’, 蓋以此也.

이 말은 술이(述而)편 14장의 말로

冉有曰 夫子爲衛君乎아? 子貢曰 諾다. 吾將問之호리라. 入曰 伯夷叔齊는 何人也잇고? 曰 古之賢人也니라. 曰 怨乎잇가? 曰 求仁而得仁이어니 又何怨이리오? 出曰 夫子不爲也시리라.

(염유(冉有)가 말하길 “선생님께서 위(衛)나라 임금을 도우실까?” 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좋다. 내 장차 여쭤 보리라.” 자공(子貢)이 들어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고 물으니 공자 曰 옛날의 현인(賢人)이셨지. 라고 했다. <자공이> “후회했었을까요?”라고 묻자 공자 曰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또 어찌 후회했겠느냐? 라고 했다.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길 “선생님께서는 돕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문장에서 논란이 되는 글자가 爲자인데 일반적으로 돕다[助]라고 풀이하지만 다산(茶山)은 시대 상황을 고려하여 하다[爲]라고 번역하여 가설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여 물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영공(靈公)에게 죄를 지어 추방된 괴외(蒯聵) 대신 그의 아들인 첩(輒)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의리에 맞는지를 염유(冉有)가 의심하여 ‘선생님께서 <그 처지에 계신다면>위(衛)나라 임금의 지위에 오르실까?’라고 가정하여 물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반 학자들이 풀이하기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노쇠하여 남자(南子)라는 첩을 부인(夫人)으로 우대하여 총애했는데, 이 미모의 남자(南子)는 음행(淫行)이 있어서 태자인 괴외(蒯聵)는 이를 수치로 여겨서 그녀를 살해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쳐서 이 일로 영공(靈公)이 노하여 괴외(蒯聵)를 국외로 추방해 진(晉)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그 후 영공(靈公)이 죽자 위(衛)나라 사람들이 괴외의 아들인 첩(輒)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때 진(晋)나라에서 괴외를 본국으로 들여보내자 첩(輒)이 그의 아비를 막았다. 그 당시 공자가 위(衛)나라에 계시니, 위(衛)나라 사람들은 괴외는 아비에게 죄를 얻었고, 첩(輒)은 적손(嫡孫)이므로 마땅히 즉위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첩(輒)도 그 아비의 입국을 막았으니, 잘못이다. 그러므로 염유(冉有)가 의심하여 공자가 첩(輒)을 도우실까? 라고 물었던 것이다.

자공(子貢)이 이 문제를 두고 직접 화법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대해 물어서 공자의 의중을 살피려고 했는데, 이는 군자가 그 고을에 거주할 때에는 그 고을의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그 나라의 임금인 첩(輒)에 대해서 묻지를 못하고 은유적으로 물었던 것이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는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산동성에 있는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이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이 임종에 숙제(叔齊)를 세우라고 유명(遺命)을 남겼는데, 아버지가 죽자 숙제(叔齊)는 백이(伯夷)에게 양보했다. 백이(伯夷)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이므로 따를 수 없다고 도망가니, 숙제(叔齊)도 임금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같이 도망갔다. 그 뒤 무왕(武王)이 은(殷=商)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을 정벌(征伐)하려고 하니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말고삐를 잡고 간(諫)했지만 무왕(武王)은 끝내 은(殷=商)나라를 멸망시키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 백이(伯夷)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존중했고, 숙제(叔齊)는 천명(天命)을 중시했으니, 이들이 나라를 사양한 것은 모두 천리(天理)의 바름에 합하고, 각각 자신의 뜻을 얻고는 나라를 버렸으니 어찌 후회함이 있었겠는가? 이에 반해서 위(衛)나라의 첩(輒)은 나라를 차지하여 들어오려는 아비를 막아서 행여 나라를 잃을까 두려워했으니 이들을 같이 거론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공자께서 그런 첩(輒)을 위해서 조언을 해 줄 리가 없다는 말이다.

이들을 공자께서는 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무슨 후회가 있었겠느냐? 고 하신 말씀을 듣고 자공(子貢)은 공자께서 위(衛)나라 임금인 첩(輒)을 돕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백이(伯夷)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존중하여 숙제(叔齊)에게 양보했고, 숙제(叔齊)는 천륜(天倫)을 중시하여 나라를 사양했으니 이들은 모두 천리(天理)의 바름에 합하고, 인심의 편안함을 구한 것이라서 각각 자신의 뜻을 얻고는 왕위 버리기를 헌신짝처럼 여겼으니, 어찌 후회함이 있었겠는가? 이에 반해 위(衛)나라의 첩(輒)은 왕위를 차지하여 아비인 괴외(蒯聵)의 입국을 막아서 행여 왕위를 뺏길까 두려워 한 것과 비교하면 같이 거론조차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자공(子貢)이 단언코 공자께서 위나라의 첩(輒)을 돕지 않으시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문장을 볼 때 공자 문하의 제자들의 아주 높은 수준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안회(顔回)처럼 하나를 가르쳐주면 10을 아는 가르침을 스폰지처럼 흡수하는 제자가 있는가 하면 최소한 한 귀퉁이만 들어주면 세 귀퉁이는 알 정도의 제자들이었으니, 공자께서는 참 훌륭한 제자를 둔 행복한 스승이었다. 6예(六藝)에 통달한 제자만 72현인(賢人)이라 하니, 그들의 지적(知的) 수준은 스승과 버금갈 정도였음이 이 문장과 공자께서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니라 하고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은 그 말뜻을 모르고 있었지만 증자(曾子)는 바로 알아차리고 충서(忠恕)일 뿐이다. 라고 해설해 주는 장면을 볼 때 정말로 그 스승에 그 제자란 말이 실감이 난다.

이 주자(朱子)의 주해(註解)에 君子居是邦에 不非其大夫어든 況其君乎아?(군자가 그 고을에 거주할 때에는 그 고을의 대부(大夫: 邑宰)를 비난하지 않는데, 하물며 임금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이 말은 순자(荀子)의 자도(子道)편에 있는 말인데, 자로(子路)가 묻기를 “위(衛)나라 대부(大夫)가 소상(小祥)에 침상에서 잤는데 이것이 예(禮)입니까?” 공자 曰 “나는 모른다.” 자로(子路)가 나와서 자공(子貢)에게 말하길 “나는 선생님께서 모르는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도 모르는 것이 있더라.”며 그 얘기를 하자 자공(子貢)이 “내가 그대를 위해 여쭈어 보겠다.”하고 공자께 “소상(小祥)에 침상에서 자는 것이 예(禮)입니까?” 여쭈니 공자 曰 “예(禮)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자공(子貢)이 나와서 지로(子路)에게 “선생님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다. 그대의 질문이 잘못된 것이다. 예(禮)에 그 읍(邑)에 거주하면 그 읍(邑)의 대부(大夫)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다.

첫 번째 기사는 백성들이 스님이 되는 길을 막는 법의 문제점을 대비(大妃)의 언문 교지를 영돈녕(領敦寧)이상의 대신(大臣)들이 수의(收議)하는 과정에서 영의정인 윤필상이 소극적인 발언을 했다고 해서 유생(儒生)들이 들고 있어나서 비리가 있다고 까지 무함을 하자 이들을 옥(獄)에 가두자 그들이 다시 상언(上言)한데 대해서 성종이 답변한 말이다. 읍(邑)에 살면 읍재(邑宰)도 비난하지 않는데 일국의 영상(領相)을 일개 유생들이 비방하다니 과연 옳은 것인가? 를 힐문한 내용이다.

두 번째 기사는 좌의정인 정인홍(鄭仁弘)이 의정부에 보낸 글인데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했다가 폐비시키는 문제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에 비유하여 그들의 충정을 감안해 포용해 달라는 것인데, 참으로 교활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글을 보낼 것이면 서울에 올라 와서 국정을 책임 질 것이지 좌의정이란 이름만 차지하고 합천에서 각종 지령을 내리고 있는데, 필시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 문제도 대북파(大北派)들끼리 사전에 기획된 일로 그들 간에는 충분히 교감이 있었을 것임에도 그 문제로 계속 여론이 비등해 지자 충정(忠情)의 소리로 받아들여 포용하자고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면 노회함이 베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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