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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마당 > 노인영의 차 한잔, 그림 한 점
늘 청년처럼 생각하기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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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1  0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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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피카소가 그린 <수탉>입니다. 한눈에 두 그림의 차이를 느낄 수 있나요. 아니면, 그놈이 그놈 같습니까? 혹여 피카소가 닭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능력이 부족했나 하는 의심이 든다면, 다음 작품을 보시죠.

1941년 <암탉과 병아리들>이에요. 어때요? 삽화지만, 병아리의 보송보송한 털과 암탉의 새끼 사랑이 충분히 전달됩니다. 피카소의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죠. 그럼, 앞선 <수탉>은 피카소가 단순한 재현, 즉 형식적 사실성에 만족하지 못했다고 봐야합니다.

곰브리치는 화가의 그림에서 정확성을 갖고 흠을 잡으려면 두 가지를 먼저 자문해보라고 권하죠. “미술가가 사물의 외형을 바꿀 이유가 있었느냐?”, 혹은 “화가가 그르다는 판단에 확신이 섰느냐?”입니다.

잘 모르겠다면, 성급하게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익숙해진 관념을 벗어 던질 때, 비로소 화가의 메시지가 제대로 다가옵니다.

자, 다시 한 번 피카소의 수탉을 제대로 감상해봅시다. 첫 번째 작품 수탉은 안정적인 자세, 꼿꼿이 선 닭 볏, 위로 가지런히 선 꽁지, 날카로운 발톱에서 기품이 느껴지죠. 온몸의 근육을 수축하며 뭔가 세상을 향해 터뜨릴 듯 절규합니다.


반면, 두 번째 수탉은 ‘꼬끼오’하고 목청껏 소리를 지르지만, 어딘지 엉성합니다. 위로 올라간 눈동자는 물론, 벼슬, 날개, 꽁지에서 먼저 것과 차이를 보이죠. 수탉의 공격성, 뻔뻔스러움과 우둔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도 피카소 그림 보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요? 나이가 들면 점점 더 자신의 주장이 단단해집니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메시지가 전달되기 힘들지요. 늘 열려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럼 영원히 청년으로 사는 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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