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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뉴스 > 백천 김세현 直譯 <심경부주 절요> 강의
<심학도(心學圖) 풀이>
김세현 논설위원  |  k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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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1  09:3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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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학도(心學圖) 풀이>

임은(林隱) 정복심(程復心) 曰 적자심(赤子心)이란 인욕(人欲)에 빠지지 아니한 양심(良心)이요, 인심(人心)은 곧 욕심(慾心)에 눈 뜬 것이며, 대인심(大人心)은 의리(義理)가 모두 갖추어진 본심(本心)이요, 도심(道心)은 의리(義理)에 눈 뜬 것이니, 이는 두 가지 마음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형기(形氣)에서 생겨난 까닭에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성명(性命)에 근원(根源)하므로 도심(道心)이 되는 것이니, 유정유일(惟精惟一) 택선고집(擇善固執) 이하는 모두가 인욕(人欲)을 막고 천리(天理)를 지키는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신독(愼獨) 이하는 인욕(人欲)을 막는 공부이니,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하면 부귀(富貴)해도 능히 음란(淫亂)하지 않을 것이고, 빈천(貧賤)해도 능히 소신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권세(權勢)와 무력(武力) 앞에서도 능히 굴복하지 않아서 도(道)가 밝아지고 덕(德)이 확립되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계구(戒懼) 이하는 천리(天理)를 지키는 공부이니, 종심(從心)에 도달하면 마음은 체(體)요, 욕망(慾望)은 용(用)이 되어, 체(體)는 곧 도(道)에 맞을 것이요, 용(用)은 곧 의(義)에 맞게 될 것이다. 또한 음성(音聲)은 율(律)이 되고 신체(身體)는 도(道)가 되어 가히 생각하지 않아도 얻을 것[不思而得]이요, 애쓰지 않아도 적중함[不勉而中]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공부의 요지(要旨)는 모두 경(敬)을 떠날 수 없으니, 대개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이고, 경(敬)은 마음의 주재(主宰)인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한 가지에 집중하여 다른 데로 빠지지 않는다[主一無適]는 주장과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여 엄숙하게 한다[整齊嚴肅]는 주장과 그리고 마음을 거두어들인다[其心收斂]는 주장과 언제나 정신을 깨어있게 한다[常惺惺]는 주장을 익숙하게 연구하면 그 공부는 완전하게 될 것이며, 성학(聖學)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

1. <人心道心章>-書經 大禹謨

帝曰 人心은惟危하고道心은惟微하니惟精惟一하여允執厥中하라.

순(舜)임금 曰 인심(人心)은 단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道心)은 그저 가려져 드러나지 않으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오직 한 결 같이 하여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아야 하느니라.

朱子曰 心之虛靈知覺이一而已矣 而以爲有人心道心之異者는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고或原於性命之正 而所以爲知覺者ㅣ不同하니是以로或危殆而不安하고或微妙而難見爾라然人莫不有是形하니故雖上智라도不能無人心하고亦莫不有是性하니故雖下愚라도不能無道心하니二者ㅣ雜於方寸之間 而不知所以治之 則危者愈危하고微者愈微 而天理之公이卒無以勝夫人欲之私矣라精則察夫二者之間而不雜也오一則守其本心之正而不離也라 從事於斯하여無少間斷하여必使道心으로常爲一身之主 而人心으로每聽命焉 則危者安하고微者著하여而動靜云爲ㅣ自無過不及之差矣니라.

주자(朱子) 曰 마음의 허령지각(虛靈知覺)은 1가지인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겨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근원(根源)하기도 하여 지각(知覺)됨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심(人心)은 위태하여 불안하고, 도심(道心)은 은미(隱微)하여 드러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형기(形氣)가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심(人心)이 없을 수 없고, 역시 성명(性命)이 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심(道心)이 없을 수 없다. 2가지는 사람의 마음속에 함께 있어서 그것을 다스릴 줄 모르면 위태한 것은 더욱 위태로워지고 은미(隱微)한 것은 더욱 은미해져서 천리(天理)의 공정(公正)함이 마침내 인욕(人欲)의 사사로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정밀히 한다는 것은 2가지의 서로 다름을 분명히 알아서 서로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이요, 한 결 같이 한다는 것은 본심(本心)의 올바름을 지켜서 거기서 떠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에 힘껏 노력하여 잠시라도 단절(斷絶)되지 않도록 해서 반드시 도심(道心)으로 항상 일신(一身)의 주재(主宰)가 되게 하고, 인심(人心)은 도심(道心)의 명(命)에 따르도록 하면 위태함은 절로 편해지고, 은미(隱微)함은 절로 드러나게 되어 동정운위(動靜云爲)함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허령(虛靈)은 심(心)의 체(體)이고 지각(知覺)은 심(心)의 용(用)이다. 리(理)와 기(氣)가 합(合)해져서 자연스럽게 허령지각(虛靈知覺)의 신묘(神妙)한 현상이 생겨난다. 허령(虛靈)은 미발시(未發時)의 지각(知覺)이요, 지각(知覺)은 이미 동(動)한 허령(虛靈)이다. 故로 허령지각(虛靈知覺)이 모두 체용(體用)을 겸하고 있고, 다만 대대(待對)해서 말하자면 체용(體用)이 된다. 지극히 허(虛)한 가운데 지극히 실(實)한 리(理)가 있고,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 동(動)할 수 있는 조짐(幾)이 있는 까닭에 능히 감(感)에 따라 응(應)하므로 심(心)은 고요한데도 감응(感應)할 수 있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다만 하나의 심(心)이 있을 뿐인데, 지각(知覺)이 이목(耳目)을 따라 나타나면 인심(人心)이고, 지각(知覺)이 의리(義理)를 따라 나타나면 도심(道心)이라고 했다. 또 도심(道心)은 의리(義理)에서 나온 것이고, 인심(人心)은 인신(人身)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즉 인심(人心)은 칠정(七情)이고, 도심(道心)은 사단(四端)이 된다.

朱子曰 所謂 擇善而固執之니라擇善은卽惟精也오固執은卽惟一也라又如博學審問愼思明辯은皆惟精이오篤行은是惟一也라中庸明善은惟精也오誠身은惟一也라大學致知格物은非惟精이면不可오能誠意則惟一이라.

주자(朱子) 曰 소위 ‘선(善)을 택(擇)해서 그것을 굳게 지켜라.’는 말의 선(善)을 택(擇)한다는 것은 곧 정밀(精密)함을 말하는 것이고, 굳게 지킨다는 것은 곧 한 결 같이 함을 말하는 것이다. 또 ‘넓게 배우고 자세히 묻는다.’ ‘삼가 생각하고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모두 정밀(精密)하게 하는 것이고, ‘독실(篤實)히 실천(實踐)한다.’는 것은 한 결 같이 하는 것이다. 중용(中庸)에서 ‘선(善)을 밝힌다.’는 것은 정밀(精密)히 하는 것이고, ‘자신을 성실(誠實)하게 한다.’는 것은 한 결 같이 하는 것이다. 대학(大學)에서 ‘앎에 이르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한다.’ 함은 정밀(精密)하게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요, ‘뜻을 성실(誠實)히 한다.’는 것은 한 결 같이 하는 공부이다.

논어(論語)의 박문(博文)은 유정(惟精)이고 약례(約禮)는 유일(惟一)이다. 주자(朱子)는 유정(惟精)을 자세히 살펴서 뒤섞이지 않게 하는 것으로 해석했으니,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치지격물(致知格物)을 말하지 못하며, 정(精)이 아니면 살펴도 소득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이지, 정(精)에서 시작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른다는 말은 아니다.

問 人心道心을伊川은說天理人欲이便是라하더이다.曰 固是어니와但此는不是有兩物이라 只是一人之心이合道理底ㅣ是天理요徇情欲底ㅣ是人欲이니正當於其分界處에理會니五峯云 天理人欲이同行異情이라하니說得最好하니라.

묻기를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대해 정이천(程伊川)은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이 이것이다.”하더이다. 하니 曰 참으로 옳다. 다만 이 말은 2가지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이 도리(道理)에 합치(合致)되는 것은 천리(天理)이고, 욕정(欲情)에 따르는 것은 인욕(人欲)이니, 마땅히 그 나누어지는 곳을 알아야 한다. 오봉(五峯) 호굉(胡宏)이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은 함께 움직이지만 정(情)을 달리 한다.”고 했으니 이 설(說)이 가장 좋다.

주자(朱子)는 처음에는 인심(人心)을 사욕(私欲)으로 보았으나 만년(晩年)에는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이 아니라고 보았다.

又曰 道心이雜出於人心之間하여微而難見하니故必須精之一之而後에中可執이니然此又非有兩心也라陸子靜云 舜이若以人心으로爲全不好則須說使人去之어늘今止說危者는不可據以爲安耳니라 精者는欲其精察 而不爲所雜也라하니此言이亦自是하다.

또 도심(道心)이 인심(人心)과 함께 섞여서 표현되므로 은미(隱微)하고 확인하기 어렵다. 故로 반드시 정밀(精密)하고 한 결 같이 한 연후에야 가히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는데, 그러나 이는 2가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정(子靜) 육구연(陸九淵)이 曰 “순(舜)임금이 만약 인심(人心)을 전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면 모름지기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버리라고 했을 터인데, 지금은 위태롭다고만 한 데 그친 것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밀(精密)하게 한다는 것은 정밀(精密)하게 살펴서 잡(雜)되게 섞이지 않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말 역시 스스로 옳다.

問 道心惟微한대曰 義理精微를難見이오且如利害는最易見이라是粗底로되然鳥獸는己有不知之者하니라又曰 人心道心이只是爭些子니孟子曰 人之所以異於禽獸者ㅣ幾希라하시니라.

‘도심(道心)은 다만 은미(隱微)하여 드러나지 않는다.’ 에 대해 물으니 曰 의리(義理)는 정밀(精密)하고 은미(隱微)해서 드러나기가 어렵고 이해(利害)같은 것은 가장 쉽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하찮은 것이지만 그러나 새나 짐승은 알지 못하는 것이다. 又曰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다만 이처럼 미세(微細)한 문제에 대한 논쟁(論爭)이다. 맹자(孟子)는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거의 없다.”고 했다.

의리(義理)는 정밀(精密)하고 은미(隱微)해서 드러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도심(道心)의 은미(隱微)함에 답(答)하기를 의리(義理)가 형상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까닭에, 이해(利害)의 조잡하고 천박함과 같이 드러난 것을 가지고 그 쉽게 알 수 있음을 말한다면 듣는 사람이 이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의리(義理)의 알기 어려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조수(鳥獸)는 배고프면 먹고 목마르면 마실 줄은 알지만 이해(利害)를 알지 못하고, 중인(衆人)은 이해(利害)는 알지만 의리(義理)를 알지 못하며, 오직 군자(君子)만이 금수(禽獸)와 다른 점을 갖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의리(義理)의 정밀(精密)하고 은미(隱微)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주자(朱子)가 인심(人心)이 도심(道心)과 다름은 그것이 어떤 것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 어떤 것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根源)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근원(根源)한다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미루어 들어가는 것이므로 본래 은미(隱微)함이 있었기 때문에 은미(隱微)하다고 하고, 생겨난다는 것은 사물(事物)에 감응(感應)해서 동(動)하는 것이므로 본래는 없었음을 아는 까닭에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이목구비(耳目口鼻) 등의 심(心)에서 발(發)했어도 정리(正理)를 잃지 않으면 모두 천리(天理)인 것이다. 故로 인심(人心)을 인욕(人欲)이라 할 수 없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正)과 사(私)가 밖으로 드러난 까닭에 인욕(人欲)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 본래 있어서 은미(隱微)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미루어 들어가서 알기 때문에 은미(隱微)하다고 했고, 위태롭다는 것은 인욕(人欲)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問 危는是危動難安否잇가曰 不止是危動難安이라大凡 徇人欲이自是危險이니其心 忽然在彼하고又忽然在四方萬里之外하니莊子所謂其熱焦火하며其寒凝冰이라凡苟勉者ㅣ皆幸也니動不動에便是墜坑落塹이라危孰甚焉이리오

묻기를 “위태롭다는 것은 위태롭게 움직여서 편안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까?”하니 曰 이는 위태롭게 움직여서 편하기가 어려운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인욕(人欲)에만 따르는 것이 위태한 것이니, 마음이 홀연히 저쪽에 있다가, 또 홀연히 사방 만리(萬里) 밖에 가버리기도 한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그 뜨겁기가 불이 붙는 듯 하고, 그 차갑기가 얼음을 얼 듯 하다.’는 것과 같다. 겨우 면한 사람은 다 요행이다.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이는 바로 구덩이에 빠지거나 도랑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 위태롭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

問 聖人亦有人心하니不知亦危否잇가曰 聖人은全是道心이主宰하니故其人心이自是不危하나니若只是人心也면危라故曰 惟聖이라도罔念하면作狂이라하니라.

묻기를 “성인(聖人)도 또한 인심(人心)이 있으니, 단언할 수 없지만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답왈(答曰) 성인(聖人)은 전적으로 도심(道心)이 주재(主宰)하는 까닭에 인심(人心)이 저절로 위태롭지 않다. 만약 성인(聖人)이 인심(人心)에만 의존한다면 위태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미치광이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勉齋黃氏曰 以堯舜之聖으로處帝王之尊 而所以自治其心者ㅣ如此어늘世之學者ㅣ不知此心之爲重하여任情縱欲하고驕逸放肆하여念慮之頃에或升而天飛하며或降而淵淪하며或熱而焦火하며或寒而凝冰하여如狂惑喪心之人이라雖宮室之安과衣服之適과飮食之宜를亦茫然莫之覺也하나니豈不深可憫哉리오聖賢垂訓이炳然明白하니學者ㅣ亦盍深思而熟玩之哉리오

면재(勉齋) 황간(黃幹)씨 曰 요순(堯舜)은 성인(聖人)으로서 제왕(帝王)의 높은 자리에 앉았지만 스스로 그 마음 다스림이 이와 같았거늘, 세상에 학자(學者)는 마음의 중(重)함을 알지 못하고, 정욕(情欲)을 함부로 쫓아서 교만하고 안일하며 마음대로 거리낌 없이 행한다. 잠깐 생각하는 사이에 혹은 솟아올라 하늘로 날기도 하고, 혹은 떨어져 물에 빠지기도 하여 뜨겁기가 불이 타는 듯하고 차갑기가 얼음을 얼릴 듯 한 것이 마치 미치거나 현혹되어 마음을 뺏겨버린 사람과 같다. 비록 집이 편안하고 의복이 몸에 맞고 음식이 입에 맞더라도 망연해서 깨닫지를 못하니, 어찌 심히 가련하지 않겠는가? 성현(聖賢)이 내린 훈계(訓戒)가 불빛처럼 분명하니, 학자(學者)가 어찌 깊이 생각하여 그 뜻을 새기지 않겠는가?

西山眞氏曰 人心惟危以下十六字는乃堯舜禹傳授心法이오萬世聖學之淵源이라先儒訓釋이雖衆이나獨朱子之說이最爲精確하다夫聲色臭味之欲은皆發於氣하니所謂人心야오仁義禮智之理는皆根於性하니所謂道心也라人心之發은如銛(섬)鋒하며如悍(한)馬하여有未易制馭者라故曰危오道心之發은如火始然하고如泉始達하여有未易充廣者라故曰微니라惟平居에莊敬自持하여察一念之所從起하여知其爲聲色臭味而發인댄則用力克治하여不使之滋長하고知其爲仁義禮智而發인댄則一意持守하여不使之變遷이니夫如是 則理義常存 而物欲退聽하여以之酬酢萬變에無往而非中矣리라.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 曰 인심유위(人心惟危) 이하 16글자는 요순우(堯舜禹) 임금이 전해 준 심법(心法)이니, 만세(萬世)토록 성학(聖學)의 연원이다. 선유(先儒)들이 해석해 놓은 것이 비록 많으나 오직 주자(朱子)의 주장이 가장 정확하다. 대저 소리, 색, 냄새, 맛과 같은 욕망은 모두 기(氣)에서 발(發)하는 것이니, 이른바 인심(人心)이고,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치는 모두 성(性)에 근원하는 것이니, 이른바 도심(道心)이다. 인심(人心)이 발(發)하는 것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고, 사나운 말과 같아서 제어하기가 어려우므로 위태롭다고 한다. 도심(道心)이 발(發)하는 것은 불이 처음 붙을 때와 같고, 샘이 처음 흐를 때와 같아서 크게 발휘하기가 어려우므로 은미(隱微)하다고 한다. 오직 평상시에 장중(莊重)하고 공경(恭敬)함을 스스로 지켜서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잘 살펴, 그것이 소리, 색, 냄새, 맛을 위하여 발(發)했음을 알면 힘을 기울여 기필코 다스려서 자라지 못하게 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위해서 발(發)했음을 알면 한결 같은 의지로 붙잡고 지켜서 변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릇 이와 같이 하면 이치와 의리가 언제나 자리를 지키고 물욕(物慾)은 물러나 복종을 하니, 이로써 모든 일에 대응하면 무슨 일을 해도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

魯齋王氏曰 朱子 謂人心道心 不同은以其或生於形氣之私하고或原於性命之正이라하니旣曰 私卽人欲矣어늘又曰 人心은不可謂之人欲은何也오蓋原字는自外推入하니知其本有故로曰微오生字는惑物而動하니知其本無故로曰危라正字私字ㅣ皆見于外者라故로人心을不可謂之人欲이니人心이若便是人欲이면聖人이必不曰危러니危者는謂易流於人欲也니라因手畵成圖하노라

<人心道心圖>

私(사) 危(위)

正(정) 形氣性命(형기성명) 微(미)

노재(魯齋) 왕백(王柏)씨 曰 주자(朱子)가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이 같지 않음은 그것이 어떤 것은 형기(形氣)의 사사로움에서 생기고, 어떤 것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 근원(根源)하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이미 사사로움은 인욕(人欲)이라고 해 놓고, 다시 인심(人心)은 인욕(人欲)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까닭은 무엇인가? 대개 ‘근원한다.’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미루어 들어가는 것이므로 본래 있었음을 아는 까닭에 은미하다고 하고, ‘생겨난다.’는 것은 사물에 감응해서 동하는 것이므로 본래는 없었음을 아는 까닭에 위태롭다고 한 것이다. 또 ‘올바름’과 ‘사사로움’은 다 밖으로 드러난다. 故로 인심(人心)을 인욕(人欲)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심(人心)이 만약 인욕(人欲)이라면 성인(聖人)이 반드시 위태롭다고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태롭다는 것은 인욕(人欲)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말한다. 손으로 그려서 그림으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퇴계(退溪)가 월천(月川) 조목(趙穆:趙士敬)에게 답한 편지에 曰 도설(圖說)에는 분명치 않은 곳이 많다. ‘본래 없었음을 아는 까닭에 위태롭다.’고 한 것은 그런대로 옳지만 ‘본래 있었음을 아는 까닭에 은미하다.’고 한 것은 그 은미함이 어찌 본래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이목구비(耳目口鼻) 등이 심(心)에서 발생했어도 정리(正理)를 잃지 않으면 천리(天理)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심(人心)을 인욕(人欲)이라 할 수 없는 것이지, 처음부터 정(正)과 사(邪)가 밖으로 드러나는 까닭에 인욕(人欲)이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대의(大意)를 미루어 본다면, 본래 있었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밖에서부터 미루어 들어가서 알기 때문에 은미하다고 하는 것이다. 정(正)과 사(邪)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인욕(人欲)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위의 문장 이하 논(論)한 내용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바로 미자(微字)를 아래쪽에 배치한 것은 나정암(羅整菴=羅欽順)이 적연부동(寂然不動)한 것이 도심(道心)이라고 한 것과 서로 통한다. 이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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