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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마당 > 노인영의 차 한잔, 그림 한 점
늘 청년처럼 생각하기(두 번째 이야기)
노인영 논설위원  |  nohproble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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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16  10: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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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그림이 이래?” 하고 현대를 사는 당신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검정과 금빛의 야상곡 : 추락하는 불꽃(로켓, 1875)>이죠. 하물며 고갱 이전 1877년 개인전에서 이런 작품을 선보였으니, 비평가들의 혹평은 당연했습니다.
 
당시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녔던 평론가 존 러스킨은 ‘미완성 작품’에 200기니(오늘날 파운드)나 제시했다며, 대놓고 “대중의 얼굴에 물감통을 내던졌다”라고 악담을 퍼부었습니다.


사건은 ‘명예훼손’ 소송으로 번졌고,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예술을 위한 예술’ 논쟁으로 확대되며,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스캔들이 됩니다. 휘슬러는 이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손해배상금으로 겨우 1파딩(당시 4분의 1페니)을 받아요. 그리고 소송비용과 이후 미술품 구매자들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1879년 파산합니다.

휘슬러는 당시 관찰과 사실주의 기법, 특히 예술작품에서 도덕적 역할을 강조하는 풍토를 모두 거부했어요. 따라서 그의 소송은 화가의 주관적 해석을 존중하라는 의도였다고 봐야 합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회색과 금색의 야상곡 : 첼시에 내린 눈(1876)>과 비교해 볼까요. 이후 작품임에도 추상성이 상대적으로 옅습니다. 결국, 추상의 정도는 작가의 자의적인 의도에 따라 달라진 거죠.
 
대중에겐 현대 미술, 특히 추상에서 역시 비슷한 감정이 잔존할 겁니다. 다행이 오늘날에는 이것이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작가의 해석과 미술 시장의 평가에 맡긴다는 점에서 다르죠. 세상사도 같은 맥락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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